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인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다시 읽습니다. 조선왕조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 헌신적인 충성으로 나라를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구해낸 충무공의 필적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새로운 깨달음을 던지며 내 앞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충무공 앞에 더욱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그가 나라의 위기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의 위기에서도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충무공은 혁혁한 역전(歷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모함과 음해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화살이 날고 포성이 울리는 전장의 지휘대에서 곧장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약간의 이설(異說)이 있기는 하지만, 충무공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억울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 되어 있는 듯합니다.
신기하게도, 난중일기에는 충무공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나 자기를 모함한 자들에 대한 원한의 기록이 단 한 줄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다만 ‘어떻게 하면 저 막강한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선의 장병들로 하여금 사기를 잃지 않고 승리를 확신케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국가의 명운을 짊어진 수군사령관으로의 엄격하고도 절제 있는 진중(陣中) 생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마음가짐,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공정하고 사심 없는 상벌의 원칙, 임금에 대한 솔직담백한 간언(諫言), 수많은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자신을 모함하는 간신모리배들에 대한 비난이나 원통함의 표현들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충무공에게는, 모함 당한 자신의 처지보다 왜적의 침입을 당한 나라의 처지가 더 긴박한 일이었기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라를 잃고 나면 자신의 억울함이 풀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충무공이 위대한 애국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나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투철하게 인식한 데에 있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충무공은 자신을 둘러싼 더러운 인간행태들을 비난하는 데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은 일을 접어두고, 다만 자기에게 맡겨진 큰 일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점이 충무공의 가장 뛰어난 인격이 아닐까 합니다.
- 이 험한 난세에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새롭게 읽어보는 하나의 소회입니다. <『바보가 그리운 시대』, 이우근>
하찮은 일에 민감하고 막중한 일에 둔감하면
『난중일기』는 꾸밈없는 충효의신(忠孝義信)으로 엮인, 위대한 무인(武人)의 진심 어린 기록이라는 점에서 오고 오는 세대 앞에 큰 빛을 던져주고 있으며, 영웅의 인품에 걸맞은 웅혼(雄渾)한 필치 또한 뛰어난 문학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모함과 음해로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것과 맞붙어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인다면, 오늘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모함과 음해는 그것 자체와 맞붙어 싸울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해나갈 때 저절로 소멸되고 마는, 그런 덧없는 일입니다.
모함과 음해로 어리석은 사람들 몇몇을 잠시 속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속지 않습니다. 속더라도 곧 진실을 알고 돌이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거짓은 언제고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 또한 그 감추어진 빛을 환히 비추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모함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는 모함하는 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인격 내 성품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내 평소의 삶이 어떠한가, 내 인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감화를 주고 있는가에 따라서, 모함과 음해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억울한 일에 마음 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인격과 내 삶에 더욱 마음 쓸 일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권력을 거머쥔 사제들의 교활한 음해와 우매한 민중의 오해로 죽음을 맞으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루카 23,34).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도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명상의 철인 파스칼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하찮은 일에는 지극히 민감하면서도 막중한 일에는 너무도 둔감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를 헐뜯고 거짓으로 모함하는 사람, 또 그것에 가볍게 귀를 기울이며 쉽사리 맞장구를 쳐대는 경박한 무리들 때문에 속상해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처럼 속상해 하는 나의 보잘것없는 인격을 스스로 나무라며 오직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전력투구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보다 성숙한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 험한 난세에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새롭게 읽어보는 하나의 소회입니다.
<『바보가 그리운 시대』, 이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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