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삶과 전 인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인류란 무엇입니까? 개개인 집합체입니다. 너와 나, 그들 집합입니다. 일찍이 옛 성인들은 이런 개체와 전체 상관관계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그 대표가 불교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은 개체와 전체 상관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 사상을 압축해 놓은 신라 의상스님 <법성계>에 실린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법성원륭 무이상 제법부동 본래적法性圓融 無二相 諸法不動 本來寂’
법 성품은 모든 현상 근원이며, 모든 현상 근원은 본디부터 원만하고 막힘이 없어서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흔들림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고 질서 정연하다는 것입니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논리 비약이 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깊이 참구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조화와 균형 소식이 있습니다.
꼭 십년 전 길상사 개산 2주년 법석에서 법정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여기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는 말이 지닌 의미를 잘 알아 정치를 한 임금이 있다.
세종 재위 9년 때. 형조판서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지게에다 이상한 것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멈추게 했다. 몸은 분명 사람 같은데 가죽과 뼈가 파리하게 붙어있었다. 조사를 해봤더니 그것은 바로 집현전 학사 권채 집 여종이었다. 사연을 알아보니 권채가 자기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자, 부인이 질투해서 덕금을 학대한 것이었다. 방에 가두고 발에 쇠고랑을 채우는가 하면, 밥 대신 오줌과 똥을 먹게 하는 따위로 수개월 동안 사람으로서 차마 하기 어려운 악한 짓을 했다는 게 조사 내용이었다. 형조판서 보고를 받은 세종은 깜짝 놀랐다.
세종은 “권채가 성품이 안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잔인했던가. 아마도 아내에게 눌려서 그런듯하니 끝까지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의금부에서 올린 조사 보고서에는 권채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되어있다. 권채가 집현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부인이 그런 일이라고 남자종하고 여자종 하나가 진술하고 있다.
조사하다 보니 부인과 권채, 여종 덕금 말이 서로 엇갈렸다. 그런데 정작 세 사람을 대질 할 수는 없어서 사건 진상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수령고소금지법’때문이었다. 종이 상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나쁜 말을 할 수 없게 만든 법규였다. 이때 세종이 새로운 법해석을 내놨다. “권채 일은 비록 종과 상전 일이지만 노비가 스스로 고소한 게 아니라 나라에서 형조판서가 알고 조사한 일이기 때문에 수령고소금지법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유권 해석으로 비로소 잘잘못이 가려질 수 있었다. 권채는 여종 덕금이 학대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고 밝혀졌다.
결국 권채는 벼슬을 회수당하고 지방으로 유배를 갔다. 그 아내는 속전을 받고 풀려났다. 곤장을 맞아야 하는데 사대부 아내이기 때문에 맞지 않고 죗값을 대신하는 돈을 내고 풀려났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허조는 계집종 하나 때문에 집현전 학사 부부를 심하게 처벌하면 자칫 강상綱常 문란해질 수 있다면서 처벌을 반대했다. 하지만 세종은 이렇게 대답한다. “비록 계집종일지라도 이미 첩이 되었으면 마땅히 첩으로써 대우해야하며, 그 아내 또한 마땅히 가장 첩으로써 이를 대우해야하는데, 그 잔인 포악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하겠는가.” (세종실록 9년 9월 4일) 이 말은 세종이 가진 사람관을 잘 드러나는 말이다. 어진 군주 세종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를 이룬다는 조화와 균형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하나하나 낱 사람, 백성들 속에 온 나라가 담겨있음을 잘 알아차린 조처였다.
세종은 또한 노비 덕금이 처했던 곤경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임금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해도 상심傷心할 터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진실로 차별 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9년 8월 29일)
세종 때 천하 명화로 알려진 그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밥을 떠먹이는 그림이었다. 장안에 자자한 소문에 끌려 세종이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긴 참 잘 그렸는데…쯧쯧, 안타깝게도 이 그림 속에 노인은 입을 다물고 있구나.”
신하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는 표정으로 임금 얼굴과 그림을 번갈아가면서 멀뚱거렸다.
세종 말이 이어진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이 먼저 벌어지는 법이거늘, 이 노인은 무엇에 화난 사람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지 않느냐.”
엄마가 아이에게 밥을 떠먹일 때 밥을 한 숟가락에 뜨고 그 위에 반찬을 얹어 아이 입 가까이 가져 간 뒤에 “아가! 아.” 하며 자기 입을 벌린다. 그러면 아이는 입 벌린 엄마를 바라보며 제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는다. 세종은 그 그림에 진실이 담기지 않은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이치를 잘 헤아려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임금이었기에 백성들 심경이나 처지를 깊은 헤아려 선정을 펼칠 수 있었다.
세종은‘누가 우리 곁에서 사라질 때 그 개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부분이 사라진 것이다.’는 이 말을 바르게 이해하는 지도자이다.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나라, 백성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 나라가 왕에게는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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