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00주년 김삿갓 시대와 사회의 추방자였던 그는 한과 울분과 죄책감의 늪에 자신을 빠뜨려 놓고 처절한 목소리로 속울음을 토해냈다.
유일한 벗이었던 시가 없었더라면 분통과 화통이 모두 터져 요절 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강원도 영월군 금강공원에 세워진 김삿갓 시비 조선조의 풍운아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ㆍ1807-1863). 서러운 나그네로서 하늘을 삿갓으로 가린 채 다녔다고 해 김삿갓으로 불렸고, 후대는 김병연보다 김삿갓 또는 그 한자어인 김립(金笠)으로 더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들의 간절한 귀가 권유도 뿌리친 채 방랑을 계속하다가 멀고 먼 타향에서 객사하는 비운을 맞는다.
아, 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려운 나그네여/얼마나 길가에서 외롭게 방황하였던고라는 한탄과 자위에서는 가슴을 저몄을 절통의 아픔이 느껴진다.
자학에 가까울 만큼 스스로를 달달 볶아대면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평생 동안 유리걸식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무 살 무렵에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차지했던 시제(詩題)가 자신의 가족사와 관계 있음을 그가 미리 알았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부끄러움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훌훌 털고 꿋꿋이 사는 게 더 적극적인 삶이 아니었느냐는 질책도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김삿갓의 고뇌와 아픔은 이 단계를 넘고 있었다. 시대 상황 역시 멸문지화를 당한 그가 가슴을 펴고 다닐 만큼 녹록지 않았고, 망국을 향해 치닫는 세도정치와 그 악폐는 갈수록 극에 달한 가운데 임금과 백성은 삼년가뭄의 땅바닥처럼 갈라질대로 갈라져 한 덩어리로 만나기는 이미 글렀다.
이런 정황을 헤아린다면 김삿갓의 유리걸식이 그저 허무와 퇴폐의 소산이 아니었음을 이해하며 그의 삶을 온전히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싶다.
잘 아는 바처럼, 선천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농민반란군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면서 그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다. 세도가 안동김씨의 피붙이였던 김익순은 학정에 반발해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투항함으로써 가문의 영예와 위세에 똥칠을 해버린 것이다.
이는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숨진 가산군수 정충신의 충절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김익순의 일가에 참혹한 재앙을 초래했다.
김익순은 처형됐고, 아들이자 김병연의 아버지인 김안근은 화병으로 죽었으며 나머지 가족도 역적의 자손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고향인 양주를 떠나야 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김병연은 세도가의 일족으로서 떵떵거리며 살았을지 모른다.
김익순은 임금의 외척인 김조순과 같은 항렬이었고, 아버지 김안근은 김문근, 김좌근과 동렬이어서다. 따라서 김병연도 김병기, 김병국, 김병학 등과 한말 풍운을 함께 감당하는 중추세력이었을지 모른다.
안동 김씨 세도가문은 헌종-순조-철종을 거치면서 임금도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결과론이나 그가 참가한 백일장에 내걸린 시제 가산군수 정충신의 충절의 죽음을 기리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뻗침을 탄식한다(論鄭嘉山忠節史 嘆金益淳罪于天)는 장래 창창한 그를 파탄으로 부르는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김익순의 죄상을 신랄히 질타하는 글로 장원의 영예를 안았던 그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가족 내력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는다.
삿갓을 푹 눌러쓰고 유랑길에 오른 것은 다시는 하늘을 보지 않겠다는 치욕과 죄책감의 표현이자 다짐이었다.
영월군 김삿갓 계곡에 있는 섶다리 주어진 운명에 거역도, 반항도 용납하지 않았던 획일적 가치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찬 시를 거침없이 뿌리고 다녔다.
앉을자리는 물론 설자리도 없는 그에게 방랑과 시는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셈이다.
삶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버린 채 갑남을녀를 차별하지 않고 만났고, 추상같은 그의 시세계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되지 못할 만큼 차가웠다.
자기시대에서 추방됨으로써 오히려 자기시대와 밀착했기에 그의 진가는 오늘도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빛나고 있다고 하겠다.
오언절구, 칠언절구, 율시가 대부분인 그의 시는 한시의 기본운율마저 깨버림으로써 삶과 같은 파격을 이뤘다. 서당이든 주막이든 발길 닿는 대로 몸을 눕히고 밥을 얻어 먹으며 기지 넘친 시어들을 뱉어냈던 것이다.
김병연을 버리고 김삿갓이 된 그는 모르는 글자가 나올라치면 눈 어둡다 핑계대고/술잔 돌면 늙었다고 먼저 드네라며 선비의 허위의식을 가차없이 까뭉갰다.
중과 선비가 추레한 자신의 행색을 꾸짖자 둥글둥글 중대가리 땀에 전 말부랄/선비 머리 뾰족한 상투 개좆 얹었구나라고 일갈했고, 거들먹거리며 맹자를 읽는 양반의 아들을 보고는 그 꼬락서니가 갓 생긴 원숭이요, 그 목소리는 와글거리는 개구리 같구나라고 내질렀다.
나이 57세로 죽기까지 세속을 초월해 살았던 김삿갓. 방금 전까지 침이 마를 정도로 외치던 주장과 신의가 눈앞의 한 줌 이익 앞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기 일쑤인 가벼움의 시대에 그가 던지는 교훈은 뭘까?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국을 떠돌며 시로써 사회상을 증언하고 고발했던 그가 현장 속의 1인 언론인으로 남긴 메시지는 또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에 그가 살고 있다면 어떤 해학과 풍자로 가슴 철렁이는 일침을 가할까?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보헤미안이었던 김병연, 아니 김삿갓 탄생 200주년을 맞으면서 그의 생애와 문학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그리고 발자취가 남긴 통렬한 파격과 뼈저린 고뇌, 끝없는 방랑이 갖는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된다. 올해로 열 번째를 맞는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문화큰잔치가 얼마나 풍성하게 열려 그의 영혼을 위로 해 줄지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