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호 아버지 보세요
건호 아버지!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써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이 나이에 당신한테 편지를 쓴다는 게 쑥스럽지만 마주보고 하지 못하는 말을 글로 대신합니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고 집을 나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습니다.그동안 당신과 제게 많은 시련과 역경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씩씩하던 그 걸음걸이는 여전하더군요.
여보 힘드시죠?
항상 강한 줄만 알았던 당신이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금쪽같은 희망돼지 저금통을 받고는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 날 당신 곁에 서 있는 동안 정치를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사랑하고 희망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그리고 힘들어도 그 길은 가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대통령 안 하겠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하던 당신,무뚝뚝하기만 하던 당신의 속 깊은 사랑에 저는 말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30년 당신을 지켜 온 바위같이 앞으로도 당신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여보, 끝까지 힘내세요.
-당신의 아내 권양숙-
200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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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 조사(弔辭) 전문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 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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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옥에 보낸 노무현과 이명박
나는 노무현 재임기간에 한미FTA반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2007년 7월 3일 구속되었다. 그리고 2008년 11월 23일 이명박은 시민들의 자발적 투쟁이었던 촛불집회가에 배후가 있다며 나를 지목하고 투옥시켰다.
지난 26일, 故 노무현 대통령이 누워 계신 곳을 찾아 분향하고 애도인사 드려야겠기에, 누가 뭐래도 꼭 그래야만 하겠기에, 천리 길을 달려 봉하 마을에 다녀왔다. 고인과 유족에 대해 조건 없이 조의를 표하는 아름다운 전통문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붐비는 조의행렬을 꺼리는 사람이다. 모두들 하니까 덩달아 하는 그런 추모, 이건 더욱 아니었다. 어렵사리 분향을 마치고 나오는데 느닷없이 들이민 인터뷰 요청, 이런 저런 소회를 묻기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장렬하게 산화해 가셨다. 탈권위주의 서민대통령은 반드시 돌아 올 것이다. 슬픔을 딛고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 주권이 살아 숨쉬는, 국민 주권이 땅바닥에서 일어서는 그런 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재임시절 만났을 때 고인은 미국 앞에 당당한 대한민국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반미는 곤란하다고 당부 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한미 FTA를 추진했다지만 우리 진보진영은 경제를 비롯한 국가의 주권 수호를 위해 이를 반대하여 서로 피 터지는 충돌이 있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 직전, 6.15공동선언을 더욱 확대강화하고 특히 정치 군사부문의 장애를 제거하고 오시라고 요청 드린바 있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10.4 남북 공동선언을 통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정치적, 군사적 장벽을 허무는 위업을 이뤘다. 놀랍고, 혼신의 노력에 감사한다.
바보 노무현’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6.15와 10.4선언의 의미를 살려 자주평화통일을 반드시 실현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 가신님은 겨레를 위한 밝은 빛으로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시민의 대통령 바보 노무현, 영원한 벗이여. 6.15, 10.4선언의 주역. 민족의 빛으로 빛나시오" 나는 고인을 추모하는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부엉이 바위여 말해보라! 장렬한 전사냐, 비관 자살이냐?
600만 달라 뇌물 수수..... 말이 나오자마자 “아내가 받았답니다.”스스로 공개했는데, 혐의 있으면 수사하고 재판하여 죄 있으면 처벌하면 될 것을, 그 많은 날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짓이기고 난도질한 채 시궁창 바닥위에 질질 끌고 다녔다.
피의사실 공표죄는 어디로 사라졌나? 혐의의 사실여부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일국의 직전 대통령은 파렴치범 시정잡배에다 자기의 범죄를 아내에게 전가하고 그 뒤에 숨는 치사한 거짓말쟁이로 낙인되었다.
대검수사를 마치고 돌아온 고인이“대한민국 검찰의 수사력”은 몸서리 칠만큼 대단하다고 술회했는데 아마 사태의 본질과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노무현의 명예, 도덕성, 그의 이상과 가치는 모두 죽어버렸다. 생전의 고인은 숨 쉬는 시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숨 쉬고 있음으로 해서 자녀와 측근 동지들 모두가 결딴나게 되었는데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비관, 절망, 도피, 그래서 자살? 아니면 부도덕한 인간으로 겨우 연명?
바보 노무현 그이답게 국민의 양심과 역사의 심판대 앞에 ‘백척간두 진일보’함으로써 ‘스스로 결단한 장렬한 전사’ 그게 맞다. ‘산화’라고 했는데, 장례 분위기에 맞춰 순화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명박.
현 권력과 보수언론을 가리켜 5공 시절과 비슷하다고?
집권여당의 원내 대표가 추모와 관련하여 “정치적 이용”이니 “소요 발생 우려”니 “북 핵에 경각해야(추모보다)”라고 공개 발언했는데, 야당 하는 사람들 대응이 “권력과 언론이 5공 시절 비슷하다” 했다고?
참 우습다.
30년 전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국헌을 문란케 한 신군부, 29년 전 민주애국 광주시민을 대량 학살한 내란범죄 신군부, 헌법을 싹 쓸고 국보위를 만들어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그 신군부의 집권정당인 민정당을 잊었는가? 민정당이 민자당으로, 다시 신한국당으로, 마침내 한나라당이라고 이름만 분칠한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여?
전두환을 5천 년 이래 최고의 영도자라 칭송해 마지않은, 군사정권에 아첨하여 온갖 부귀를 누리고 확대 재생산한, 마침내 스스로 권력이 되어버린 대한미국 메이저신문들, 그 선두주자 이름이 다들 알지요? 조.중.동
대통령도 그럴 테니 검찰도 이제 특권을 놓자는 바보 노무현에 맞서 진검승부 겨룬 검찰, 합법 칼날로 군사정권에 충성 다하더니 마침내 이명박정부 들어 눈부신 승리(?) 거두고 표정관리 하기에 얼마나 힘들까? 야당하시는 양반들, 이정도는 비슷하다고 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 저 아름다운 주권국민 민주시민이 눈물 거둘 날, 웃음과 축복만 가득할 날, 언제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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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같은 사람”… 함세웅 신부가 본 노무현
헤럴드경제 | 입력 2009.05.29 07:03
"노 전 대통령은 삼손 같은 사람이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적 동지' 중 한 사람인 함세웅(67) 신부는 노 전 대통령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성경에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는 구절이 있다"며 "타락으로 인해 힘을 잃자, 회개하고 하느님께 기도해 다시 힘을 얻어 신전을 무너뜨리며 세상을 바로 세운 삼손처럼, 그 분도 자신을 버려 새 '희망'을 이어가려 하시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28일 오전 6시. 그는 주임을 맡고 있는 서울 신당6동 청구성당에서 새벽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단순한 미사였지만 간간이 '세상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원한 안식과 부활의 기쁨을 보장해주소서"라는 그의 기도도 들렸다.
그와 조식(朝食)을 함께 한 식당 TV에서는 아침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노 전 대통령 조문 행렬에 대한 소식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는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를 가보지는 못 했지만 리본이나 벽보가 산더미같이 붙어있다고 하더라"며 "일이 많아서 월요일(25일) 밤 잠시 짬을 내 봉하마을에 다녀왔는데 거기도 추모 열기가 대단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당장 영결식 이후가 문제예요. 큰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앞날이 걱정입니다. 국민들도 진정해야 겠지만, 현 정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국민과 소통해야 돼요."
뉴스 꼭지는 서거 당일 거짓 진술을 한 경호관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져 있었다. "경호관을 보호하려고 따로 계셨던 것 아닐까. 대통령 평소 성품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걸요. 직원들 아끼는 양반인데. 경호관이 지금 난처한 처지에 있으니 대통령께서 안타까워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경호원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용서해라'고 유서에 한 마디 남겼어야 한다"고 웃으며 농을 쳤다.
그러면서 그는 노 전 대통령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노 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인 송기인 신부의 소개로 처음 인연을 맺었고,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함 신부가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노 전 대통령은 그를 재임중인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돌아가신 날 소식을 듣고 황망했어요. 아무 말도 안 나오더군요. 근데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는 분예요. 그분이 기가 셀 것 같지만 안 그렇거든요.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잘 타. 처음 만나는 사람 보면 쭈뼛쭈뼛하고 낯도 좀 가리고. 그런 분이 최근 일련의 사태 속에서 꽤 부담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이 아닌 의사(義死)라고 했다. 또 교회법에 따르면 자살한 이을 위한 장례미사는 안 되지만, 기도를 드리거나 추모미사를 할 수는 있다고도 덧붙였다. "몸을 던져 바위에 부딪히며 대의를 위해 나서신 거예요.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투신(投身)은 자신의 뜻을 강하게 펴려고 할 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29일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참석했다. 그의 말대로 '동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신상윤 기자(ken@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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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두터운 지역감정의 벽을 넘고자 시도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언제나 비주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고인의 정치 역정을 김주환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정치인 노무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9년말 5공 청문회였습니다.
그러나 청문회 이후 고인의 정치 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거대 여당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 야당의 길을 지킬 것인가라는 갈림길이었지만 합류를 거부했습니다.
그 때부터 긴 정치적 암흑기가 시작됐습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총선 때는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지만 잇따라 고배를 마셨습니다.
1998년 7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지난 16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출마를 마다하고, 다시 부산에 출마했지만 또 다시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의 무모한 도전을 두고 지지자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었던 '노사모'도 이 때 결성됐습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뒤,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섰던 고인은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재임 기간 중에도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 2004년, '탄핵'을 당하는 첫 대통령이 됐지만,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대반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연정과 4년 중임제 개헌 등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진보와 보수 양 진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항상 비주류 정치인생을 걸었던 노 전 대통령.
그러나 그는 국민 경선에 의해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간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얻었습니다.
YTN 김주환[kim21@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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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 5년은 특권없는 사회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박순표 기자의 보도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녹취:노무현, 전 대통령]
"원칙을 바로 세워 신뢰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갑시다."
스스로 제왕적 대통령에서 탈피해 국가정보원과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더이상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녹취:노무현, 전 대통령]
"이제 대통령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는 더이상 없을 것입니다. 권력기관을 국민에게 돌려 드릴 것입니다."
취임 첫해 검찰 권력에 대한 개혁을 강력히 시도했습니다.
대통령도 권력을 내려 놓을테니 검찰도 권력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평검사들과의 대화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녹취:노무현, 전 대통령]
"이쯤가면 막 가자는 거죠. 청탁 전화 하지 않았습니다. 담당 검사를 불러서 토론을 하자면 하지요."
유력 신문사가 권력화됐다는 판단에 따라 언론과의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녹취:노무현, 전 대통령]
"잘 보십시오. 제가 언론과 싸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권력화된 언론이 저에게 끊임없이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또다른 정치적 목표는 지역주의 타파!
자신의 재임 기간에 지금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바꾸자며 선거법 개정을 끊임없이 추진했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녹취:노무현, 전 대통령]
"국회가 지역구도 문제 해결에 동의한다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절반 이상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 대연정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탈권력, 탈권위를 위한 도전은 늘 반발이 뒤따랐고 정치 세력간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각종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민심은 개혁 피로증을 호소했습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의 도전은 미완으로 남은 채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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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詩 박노해
오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웁니다
기댈 곳도 없이 바라볼 곳도 없이
슬픔에 무너지는 가슴으로 웁니다
당신은 시작부터 바보였습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도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다고
웅크린 아이들의 가슴에 별을 심어주던 사람
당신은 대통령 때도 바보였습니다
멸시받고 공격받고 또 당하면서도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군림하던 권력을 제자리로 돌려준 사람
당신은 마지막도 바보였습니다
백배 천배 죄 많은 자들은 웃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저를 버려달라고,
깨끗하게 몸을 던져버린 바보 같은 사람
아, 당신의 몸에는 날카로운 창이 박혀 있어
저들의 창날이 수도 없이 박혀 있어
얼마나 홀로 아팠을까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
표적이 되어, 표적이 되어,
우리 서민들을 품에 안은 표적이 되어
피흘리고 쓰러지고 비틀거리던 사랑
지금 누가 방패 뒤에서 웃고 있는가
너무 두려운 정의와 양심과 진보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지금 누가 웃다 놀라 떨고 있는가
지금 누가 무너지듯 울고 있는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인생을 사셨는데”
“당신이 지키려 한 우리는 당신을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지금 누가 슬픔과 분노로 하나가 되고 있는가
바보 노무현!
당신은 우리 바보들의 ‘위대한 바보’였습니다
목숨바쳐 부끄러움 빛낸 바보였습니다
다들 먹고 사는 게 힘들고 바쁘다고
자기 하나 돌아보지 못하고 타협하며 사는데
다들 사회에 대해서는 옳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삶의 부끄러움은 잃어가고 있는데
사람이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을 위해
목숨마저 저 높은 곳으로 던져버린 사람아
당신께서 문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운 그 음성으로 말을 하십니다
이제 나로 인해 더는 상처받지 마라고
이제 아무도 저들 앞에 부끄럽지 마라고
아닌 건 아니다 당당하게 말하자고
우리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처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향해
서로 손 잡고 서로 기대며
정직한 절망으로 다시 일어서자고
우리 바보들의 ‘위대한 바보’가
슬픔으로 무너지는 가슴 가슴에
피묻은 씨알 하나로 떨어집니다
아 나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속 깊은 슬픔과 분노로 되살아나는
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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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분하다. 주위에서도 노무현을 끔찍이 싫어하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분노하고 있다.” 82학번인 서울의 한 종합병원 부과장급 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이 너무 크다”는 노무현의 유서 내용이 발표되던 즈음이었다. 5월23일 낮 2시께였다.
“이명박은 어떻게 할 지, 두 눈 뜨고 끝까지 지켜보겠다.” 비슷한 시간 90학번인 대기업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옆에 있던, 현직 교사인 그의 부인은 “비주류들의 상징이 결국 주류에게 짓밟혔다. 우리가 끝내 지켜주지 못한 거지”라고 말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남편은, 방송에서 봉하마을에 돌아온 노무현이 “야~ 기분 좋다”고 외치는 장면을 보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현 정권의 ‘홍운탁월’(烘雲托月)
지방 출신. 빈농 아들. 고졸. 인권변호사. 재야정치인. 만년 야당. 그 총합이 노무현이다. 대한민국 주류는 한번도 그런 비주류가 최고의 권력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임 중은 물론, 퇴임 이후에도 집권여당과 보수언론으로 상징되는 주류들은 그를 조롱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사건이 터진 뒤에는 더 노골화했다. 검찰은 보수언론을 통해 그의 피의 사실을 매일 생중계하듯 공표했다. 어느 날은 부인 권양숙씨를 서울이 아닌 부산지방검찰청으로 불러 형식적으로 ‘예우’했다고 하다가, 어느 날은 ‘재소환’하겠다고 을렀다. 전직 대통령도 필요하면 두번 세번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던 1201만4277표의 무게를 잊고 있었다(2002년 당시에는 투표권이 없었던 19살 미만의 지지자들은 제외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시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욕당할 때 그들에게 전해진 불쾌감도 쌓여갔다. 그의 죽음 앞에 수많은 분노와 수많은 눈물이 흩날리는 이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증오와 보복’의 시스템이 죽음으로 몰고 갔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교체와 함께 과거 정권을 심판하고 청산하는 과정이 반복됐다”며 “그 결과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는 비극적 상황까지 빚었다”고 지적했다. 현 정권이 전 정권을 청산하는 이유는 뭘까.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는 동양화의 ‘홍운탁월’(烘雲托月)을 이야기했다. 동그랗게 여백을 남겨 놓고 구름을 그려 달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낸다. 최 변호사는 “전임정권의 부도덕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을 차별화해 온 것이 그간의 정치과정의 반복이었다”며 “이번에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주류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와 부정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들과 차별화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글자 그대로 ‘노무현 죽이기’였다.
보수언론은 재임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늘 ‘무능력과 증오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노무현 죽이기>(개마고원 펴냄)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초기의 상황이 잘 정리돼 있다. 책에 인용된 <문화일보> 2003년 6월20일치 칼럼이다. “대통령 선거 결과 대한민국은 하향평준화되었다. 월드컵 4강은 아무나 우승할 수 있다, 아무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을 키웠다. 자기 수준의 대통령을 뽑음으로써 자기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위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노 전 대통령과 그에게 투표한 이들을 ‘기준에 미달하는 이들로’ 동시에 비하했다. <조선일보> 2003년 6월23일 시론은 이렇게 말한다. “시기심이란 자기의 이득을 감소시키지 않는 타인의 행복이나 그들이 소유한 사회적 선(善)을 적대적으로 보는 심리 상태다. 이는 증오를 어머니로 해서 드러난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라는 대규모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런 명백한 악행인 시기심을 ‘도덕적인 의분’으로 포장한다는데 있다.” 이를 준거로 하면, 노 전 대통령은 주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한 시기심에 가득한 존재다. 보수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강남-삼성-서울대’로 상징되는 한국의 주류들에 대한 증오심을 현실정치에 이용한다는 프레임을 만들고자 했다. 강준만 교수는 “이들의 주장에 흘러넘치는 시기와 복수의 수사학은 이 땅의 수구 기득권 세력이 노무현에 대해 갖고 있는 반감의 강도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고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해 퇴임 이후 자전거에 매단 수레에 손녀를 태우고 마을 주변을 달리고 있다. 그는 서민적인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나타나기를 즐겼다. 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 제공
대검찰청 중수부를 강성 라인으로 바꿔
이는 재임 기간 내내 지속됐다. 신병률 경성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조선일보>의 조선만평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만들어 온 프레임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자격’ 일 것”이라며 “능력과 성격 등 모든 부분을 통틀어 ‘무능한 이미지’가 관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조선일보>의 ‘조선만평’이 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2003년 2월25일∼2008년 2월24일)에 그를 어떤 소재와 방식으로 풍자했는지 조사해 5월16일 ‘2009년 한국언론정보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독한’ 수사도 ‘증오감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많았다. 검찰은 지난 3월 인사에서 박연차 전 회장을 수사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강성 라인으로 바꿨다. 새로 들어온 이인규 중수부장과 우병우 중수 1과장은 ‘강성’과 ‘독종’ 이미지로 유명했다. 이들은 박 전 회장을 강하게 압박해 원하는 결과를 차례로 얻어냈다.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이광재 의원 등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을 줄줄이 구속시켰다.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추부길 전 홍보기획비서관 그리고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균형추를 맞출 현 정권의 실세들의 혐의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물론 부인과 아들, 딸까지 ‘비리의 온상’으로 묘사됐다. 노무현은 마지막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썼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절망에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심경을 밝혔다. 그는 죽음으로 그 고통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생활 내내 검찰과 긴장을 유지했다. 그는 변호사 신분임에도 1987년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그의 눈에 검찰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태도를 180도 바꿀 수 있는 존재’로 보였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판사 출신의 강금실 법무장관 카드를 내세워 검찰 개혁을 주문했다. 검찰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자 노무현은 그 유명한 ‘검사와의 대화’를 열었다. 정면돌파였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말을 남겼다.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은 사표를 냈다. 노 전 대통령은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 등을 통해 검찰권 제한을 시도했다. 위협을 느낀 대검 중수부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칼 끝을 겨눴다.
임기 중반에도 ‘대결’은 이어졌다.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사건으로 후임 김종빈 검찰총장이 물러 났다. 검찰 내부에서는 ‘검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검찰 조직을 흔들려고 했다’는 거부감과 반감이 조직적으로 커져갔다. 검사 출신의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의 원인을 이런 ‘원한’ 탓으로 돌렸다.
‘후폭풍’ 주 대상은 검찰과 보수언론
그럼 이명박 정부는 왜 검찰에게 노 전 대통령을 수사하도록 했을까? 정치권에서는 ‘촛불정국’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태도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쇠고기 협상에 대해 청와대는 “노무현 정부가 안 하고 간 것을 설거지 한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한나라당의 핵심 당직자는 “촛불 정국을 이끈 세력들을 검토 과정에서 이른바 ‘친노 세력들’의 그 한축을 이루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며 “청와대로서는 모래성이나 다름없는 민주당보다 한 줌밖에 안되지만 차돌처럼 결집된 친노 세력이 먼저 정리가 필요한 대상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당직자는 “내년에 있는 지방선거에서 노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들이 영남에 등장하는 것을 막자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증오와 무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 정치권력과 사법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노무현 죽이기’는 결국 그의 죽음으로 귀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결과다. 후폭풍이다. 정치 컨설팅 업체 나우리서치 이재경 대표는 “앞으로의 ‘후폭풍’은 거의 블랙홀 수준이 될 수도 있다”며 “주 대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수사했던 검찰과 그를 부도덕의 극치로 몰아간 보수언론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했다.
죽음은 한국 정치의 거대한 돌발 변수였다. 강준만 교수는 신작 <현대정치의 겉과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심정민주주의’라고 했다. 강 교수의 분석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동력은 바로 심정이 폭발한 시위였다. 4·19혁명에서부터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는 모두 시위의 결과였다. 한국인에게 차분한 대화와 토론의 마당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경험도 없었다.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이라는 (열사의) 이름이 말해주듯 결정적 계기는 늘 개인의 죽음이었다. 이게 바로 ‘심정민주주의’의 불가사의한 대목이다. ”
그 심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욱’ 하는 감정이다. 강 교수는 이를 ‘욱 민주주의’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4·19 혁명이 3·15 부정선거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마산에서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발표경관 처단하라’는 소리가 나오는 데도 서울은 3·15이후 34일 동안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욱’하는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가 없는 6월 항쟁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전임 대통령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해야
2004년 3월12일 대통령 탄핵과 그 직후의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열린우리당의 압승도 ‘욱’하는 기질의 폭발이 불러온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접한 이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이러다 민란 난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스스로 폭발 직전의 민심을 자각한 것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이명박 정부가 모든 부담을 지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의원은 “MB(이명박 대통령)는 이번 6월 국회에서 미디어 관련법 처리를 집권 후반기를 준비하는 일종의 ‘화룡점정’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는 이를 강행하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형국’이 됐다”며 “집권 후반기 전략을 사실상 다시 짜야할 상황에 이르게 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도 “이명박 대통령은 ‘사정 드라이브’를 통해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 상실한 국정장악력을 회복해 왔는데. 이제는 사정 드라이브를 사실상 중단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며 “대통령이 검찰과 세무권력을 현실정치에 동원한 것이 앞으로의 국정운영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게 생겼다”고 우려했다. 청와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한나라당의 다른 당직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것은 청와대의 민정과 정무 기능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말들이 많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차제에 청와대와 권력 주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야에서는 ‘검찰 개혁’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당 안팎에서는 김영삼 정부 초기에 시도했던 ‘중수부 해체론’을 다시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검에도 (직접 수사를 담당하는) 중수부가 있을 이유가 없다며 이를 해체하려다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을 위해 중수부를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존치시킨 바 있다”고 말했다.
이런 비극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증오의 정치’를 중단시켜야 한다. 임혁백 교수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는 전임 대통령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해야 한다”며 “한국이 아프리카도 아니고 ‘죽음의 민주주의’ 패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안전한 귀가가 보장돼야 권력을 쉽게 내놓게 되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좀더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게 된다”며 “이명박 대통령부터 그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후폭풍의 크기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열사의 죽음은 독재정권의 구조적인 억압의 결과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라는 정치적 구호가 나오기 쉬웠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어떤 정치적 구호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폭풍이 불 지, 그 정도가 얼마일 지를 예상하기는 힘들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까지 조롱하는 일부 보수세력의 태도와, ‘촛불을 막아야 한다’며 분향소 설치와 분향까지 막는 정부의 막가파식 대응이 분노를 점증시키고 있는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무덤에도 침을 뱉다
스스로 대한민국 주류를 자처하는 보수 논객 조갑제씨는 서거 당일 ‘조갑제닷컴’에 “대통령과 같은 지고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냥 죽어도 서거라고 할 만하다”며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난 자가 검찰에 출두하여 뇌물 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고발 당하기 직전에 자살한 것을 두고 ‘서거’라고 하면 말이 안된다”고 적었다. 조갑제식 표현을 따르자면, 그들은 노무현의 ‘무덤에 침을 뱉’었다.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노 전 대통령과 그의 죽음에 분노하는 ‘비주류’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비주류들의 상당수는 한국 사회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잊고 있다. 그들이 무시하고 무지한 만큼 비주류의 증오는 쌓인다. 그 증오를 다시 대물림할 텐가.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이순혁 기자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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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은 왜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었는가?
김진경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상식
그 국민에 못 배우고 힘없는 이들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상식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왜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는가?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상식
물러나면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상식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왜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는가?
법이 모든 국민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상식
법이 파당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선 안 된다는 상식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왜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는가?
당신은 늘 불편한 노무현이었습니다.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당신 자신과 우리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늘 외로운 노무현이었습니다.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편리함을 위해 너무도 쉽게 저버리는 우리들 속에서
당신은 늘 바보 노무현이었습니다.
당신의 존재는 운명적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상식
그 국민에 못 배우고 힘없는 이들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상식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늘 두려운 노무현이었습니다.
잘 나고 힘 있는 소수가
사실상 모든 걸 결정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늘 당신의 존재를 두려워했습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작고 하찮은 상식을 끝까지 품고 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거라고
헛된 희망은 품지 말라고
뙤약볕에 밀짚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평범한 농부 노무현의 모습마저 지우려 했습니다.
아, 그리고 당신을 불편해하는 우리들의 침묵이
마침내 당신을 벼랑 끝에 세우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대한민국을 너무도 깊이 사랑했으므로
칼날이 되어 들어오는 법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칼날 앞에서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하여 당신에게 죽음뿐이었습니다.
여기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하여 당신에게 죽음뿐이었습니다.
아, 늘 불편한 노무현!
나태해지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는 죽비소리로
다시 살아오소서.
아, 늘 외로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위한 싸움이야말로
가장 외롭고 힘든 싸움이라고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따뜻한 손길로
다시 살아오소서.
아, 바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꽃피는 나라로
다시 살아오소서.
우리들이 반드시 이룰 터이니
그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오소서.
아,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은
정말
이렇게
죽음으로 말해질 수밖에 없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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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을 받고 돌아가신 성웅 이순신, 작가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이 죽지 않았으면 오히려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을 암시한다. 주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아파하며 삶이 곧 죽음과 같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그에게 가하는 부당한 압제를 온 국민이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예전에 성웅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징비록>을 읽으며 읽으며 느꼈던 것이 다시금 떠오른다.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은 역사서이지만 소설못지 않게 이순신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다.
이순신의 삭탈관직이 모함으로 인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왜군의 모략도 여기에 중요하게 작용을 한다. 연전 연패하던 왜군은 조선의 해군을 유인할 계책을 꾸며, 정보인 것처럼 조선의 조정에 전달한다. 당시 집권관료들은 마땅한 검증도 없이 이순신에게 출병을 명령한다. 이순신은 왜군의 계략임을 우려하여 거부한다. 출병하면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과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면 죽임을 면하기 어려운 것도 알았을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을 죽임으로써 백의 종군하여 나중에 왜군을 물리칠 기회를 다시 가지게 되었으나, 선조는 이순신이 죽을 때까지 그의 죄를 사면하지 않았다. 난지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는 것은 소설속에 나오는 것이지만, 자신을 죽임으로써 주변과 나라를 구할 수 구할 수 있었다.
당장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한 행동에 나서, 후에 큰 삶의 길을 만들어 가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리더십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떨까? 잘나가던 변호사일에서 인권변호사로 나서 구속까지 되었다.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3당합당이라는 야합에 반발해 정치적으로 어려운 길을 걷게 된 다. 당선이 보장된 종로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연이어 낙선의 고통을 겪는다. 모든 정치인이 말하지만 하지 못했던 망국적인 지역감정과의 싸움에서 국민통합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국민들이 모여들고 노사모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오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멀어져가는 민주주의와, 부패로 자신의 명예에 얼룩을 묻히려던 사람들의 압박에 항거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따. 자신의 몸을 던져 반부패, 민주주의, 국민통합, 언론 자유의 기치가 새롭게 국민들에게 넓은 공감을 표현하고 있다.
사즉생, 죽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이순신 그리고 노무현. 우리 역사의 빛난 리더들이 아닐까.
징비록에 나오는 이순신의 리더십은 또한 원칙의 리더십과 수평주의적 리더십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맞 닿아 있다.
이순신은{[PlugIn]:http://readersguide.tistory.com/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nil_profile=} 무과에 급제한지 10년이 지나도 정읍현감에 있었다.수많은 무공을 세웠음에도 권력에 줄을 대지 않았기에 동기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고 유성룡은 말한다.
당시 중앙의 관료들은 쌀(당시 급료)외에 포목이나 소금 등의 생활필수품이 부족하던 시절에 지방현관들의 도움으로 생존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지방관료들이 주는 것은 임금에게 상납하는 것이 아닌 별도로 민간에서 차출한 것이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미암일기 (정창권저/ 사계절) 참조) 진급에서 중앙관료들의 입김이 강하였음은 당연하다고 볼 때 이순신은 민간에 대한 착취를 통해 중앙권력에 줄대기를 행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이순신이 세운 공은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지 10여 년 만에 겨우 정읍현감에 올랐을 뿐이다.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임금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며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주위에서는 반대했다.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징비록)
노무현은 3당 합당 반대와 부패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또, 이순신이 뛰어난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순신의 개인적인 뛰어남, 그 동안의 병법에 대한 연구도 바탕이 되었겠지만, 다양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수평적 리더십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 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하여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잇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던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징비록)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수평적 리더십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노무현저/ 행복한 책 읽기))대통령 시절에도 노무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좋은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지 대화하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비록 역효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검찰의 정치 중립과 민주화를 위한 ‘평검사들과의 대화’도 그런 면이 있었다고 보인다.
아직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더 있어야 하는 이야기지만, 이순신과 함께 했던 서애 유성용의 <징비록>이 이순신의 본질을 잘 보여주듯이 노무현에 대한 현재의 국민들의 평가가 역사적 평가의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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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칼의 노래>가 이순신이 사지(死地)를 찾는 여정의 서사였다는 것을 잊지 못한다. 불경스럽게도 나는 이 소설을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의 선행 텍스트로 읽는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이순신은 돌아갈 곳이 없다. 그는 왕으로부터 ‘면사첩’(免死帖)을 받은 죄인이다. 면사첩은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에게는 ‘면사’라는 말조차 거두어져야만 삶이 확보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왕이 이순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 그는 청렴했기 때문에 그 이전 대통령들처럼 완전범죄를 저지르지 못했고, 그는 강직했기 때문에 이전 대통령들처럼 수사를 거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기 때문에 괴로웠고, 그 괴로움은 엠비(MB)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권이 현 대통령은 불편하다. 현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잉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사건이 시작되었다. 청렴 노무현의 비리 의혹. 그 모순에 대해 마치 엠비는 봉하마을에 위리안치라도 할 기세였다. 그의 가족들을 다 소환하고, 12시간을 심문하고, 그의 가족사를 파렴치한의 그것으로 서사화하였다.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원망의 목소리는 짙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부끄러움은 마침내 ‘사지’를 찾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나서 오히려 국민들의 선호도가 높아졌다. 그것은 분명 현 정권에 불편한 일이다. ‘전 대통령의 현존’이 ‘현 대통령의 부재감’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엠비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시이오(CEO)의 이미지가 강했고, 정치가라기보다는 경제전략가에 가까웠는데, 그 경제조차 지지부진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엠비에게 어떤 위협이었을까.
이순신이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없었던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엠비에 의해 정치적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러므로 그가 말한 대로 ‘운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사였다. 어쩔 수 없는 궁극의 사북에서의 죽음. 유년의 원형이 간직된 봉하마을 뒷산에서의 투신. 그것이 어떻게 그저 자살일까.
다시 한 번, 이순신의 죽음을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이루시기를 기원한다. 이순신은 왕의 위협에 대해 죽음으로써 비로소 안전지대를 갖게 되었다. 그의 ‘사지’는 그래서 탈주지였던 것.
한귀은/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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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가 대통령 되면 혁명이겠지요?”
광주 경선 때 적극 지지하는 광고를 냈다
혁명일 거라 여겼던 그가 대통령이 됐다
한나라 집권 1년반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는 모든 걸 살리려 목숨을 내놓았다
2000년인가 지금은 고인이 된 윤한봉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노무현씨가 왔으니 함께 아침을 먹자고 했다. 금남로3가에 있는 무등산이라는 식당에서 예닐곱명이 추어탕을 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지없는 촌놈 모습에 순한 눈빛이 좋았다. 헤어져 오는 길에 한봉씨가 나더러 “형님,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되면 혁명이겠지요?”라고 말했다.
2002년 대선에 나설 민주당 후보 경선 때다. 노무현씨가 제주도에서 2등인가 하고 나서 광주에서 경선을 할 차례였다. 광주 사람들은 노무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광주 선후배들이 줄곧 모여서 고민을 거듭했다. 노무현씨를 적극 지지하기로 했다.
우리는 신문에 의견광고를 내기로 했다. 실력 있는 후배가 초안을 잡았다. 내가 밤에 그 원고를 손보았다. 다음날 아침 글쟁이들과 다방 귀퉁이에 앉아서 원고 검토를 마쳤다. ‘아름다운 바보, 그를 믿습니다’라는 광고글이 한겨레신문에 8단 통으로 실렸다. 선거인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극적으로 노무현씨가 광주 경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광고가 내 이름으로 나간 탓에 서울 검찰청에 불려가 7시간 조사를 받고 재판에서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선거법 위반 선고로 각각 300만원 벌금을 물고 나는 5년간 공민권(투표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우리가 내심 기대한 만큼 혁명가는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을 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교육혁명, 비정규직 문제 해결, 서울 아파트값 내리기 등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2500만명이 몰려 사는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려 무진 애를 쓰고 남북 화해와 상생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싫었다가 좋았다가 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한 지 1년반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후퇴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남북 사이도 끊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수뢰죄를 뒤집어씌우려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증거를 대라 했다. 불구속 상태든 구속 상태든 법정 다툼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되고,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부인과 자식들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민주세력이 몰락하게 되어 있었다. 피울음을 울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태일 열사처럼, 조성만 열사처럼,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로 결단을 내렸다. 예수도 죽기 전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드렸다. 노무현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였다. 자기 사람들(‘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목격하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말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노무현이 예수처럼 목숨을 바쳐서 다시 살아날(부활할) 길, 살길을 열어놓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길을 가야 하듯이 우리 국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어놓은 길을 가야 한다. 온 국민, 온 겨레가 골고루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
김수복/일과놀이 출판사 대표
그의 죽음으로 나의 청춘은 끝났다
시청 잔디밭만 밟아도 빨간줄 그어질 것 같다
국가원수의 조문도 할 수 없는 나라
과연 이 나라는 꿈을 꾸며 살 만한 곳일까
국민 대통령과 훗날 막걸리 한잔 하고 싶었건만
대학의 한 은사님께서 술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광석이 죽으면서 내 청춘은 끝났다.”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며 이른바 386세대인 교수님에게 청춘은 무엇이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단지 좋아하는 가수 김광석의 자살이 교수님께 큰 충격이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교수님의 ‘나의 청춘이 끝났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말도 안 돼’를 되뇌며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다음날인 24일에 찾아간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조문객 수만큼 많은 경찰들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의 잔디밭만 밟아도 바로 연행되어 내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질 것만 같았다. 마음 놓고 한 나라의 국가원수의 조문도 할 수 없는 나라.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란 게 있는 걸까.
난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임을 믿고 젊음을 누리며 꿈을 꾸며 살아왔다. 몰상식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 행동 등을 보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리라 생각해왔다. 비주류가 숨을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고 이 세상은 강자가 약자에게 양보하고 주류가 비주류와 함께 살아가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내가 지금껏 바라왔던 꿈, 희망, 나의 청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노 전 대통령은 조금은 다른 정치인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정치인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떤 원칙이나 소신이 보였다. 나는 그를 통해 확고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과 같이 먼 훗날에 ‘이쯤 되면 이제 좀 살 만해진 것 같지요’라며 막걸리 한잔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내 꿈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았다. 젊기에 품을 수 있는 희망이 이제 힘을 잃었다. ‘그래도 사람이 아직 희망이잖아요. 아직은 이 사회에 희망은 있어요. 내가 한번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보지요.’ 이제 더는 이 말은 내 목소리에서 나올 것 같지가 않다.
교수님이 하셨던 청춘이 끝났다는 말과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김광석의 노래 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시절 내내 외친 변화와 개혁을 이제 누구에게서 찾아야 할까. 이제 그 누가 나에게 희망을 이야기해 주고 끝나버린 청춘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줄까.
이경은/서울 성동구 행당1동
봉하마을에서 만난 동서남북 민초들!
월요일, 봉하에 다녀왔다. 전날 저녁, 지나가는 뉴스에서 부엌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미리 고무장갑을 챙겨 넣었다. 부엌일은 다른 분들께 뺏기고(?) 방명록 글 받는 일을 교대했다. 창원에서 버스 타고 땀 뻘뻘 흘리며 혼자 오신 할머니, 북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비고란에 짧은 글을 남기지 못하셨다. 경주에서 온 새댁, 4학년짜리 아들을 앞세우고 갓난아기 업고 새벽차 타고 숨 몰아쉬며 연신 땀을 닦아냈다.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 글 남기겠느냐고 물으니 일요일 와서 길에서 자고 다시 온다며 초췌한 모습으로 헛도는 웃음을 짓는다. 전주에서 왔다는 두 청년, 강의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단다. 아, 여기에 내가 만났던 그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이 모자라는 솜씨로 어찌 다 남길 수 있겠냐마는, 언제나 그래 왔듯 크고 화려하고 유명짜한 일들에 묻혀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물론 알리려고도 않는, 지금 대한민국 남쪽에서 뜨거운 봄날 일어난 이야기를, 그냥 내 가슴속에만 묻을 수 없었다. 전남 신안에서, 경북 안동에서, 동서남북을 넘나드는 이 물길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인위적으로 보를 쌓아 막는다면 언젠가는 터져버려 큰 물난리를 겪고 말리라.
서혜란/부산 사하구 신평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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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고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바침 -
안 도 현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끝도 없는 지역주의 고압선 철탑에서
버티다가 눈물이 되어 버티다가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편 가르고 삿대질하는 냉전주의 창끝에서
깃발로 펄럭이다 찢겨진, 그리하여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
저 가증스런 낯짝의 거짓 앞에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저 뻔뻔한 주둥이의 위선 앞에서 억울하다고 땅을 치지 않을래요
저 무자비한 권좌의 폭력의 주먹의 불의 앞에서 소리쳐 울지 않을래요
아아,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당신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이 나라 오월의 초록은 저리 푸르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때리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어요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한테 졌어요, 애초부터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붙이고 맞추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흐트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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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눈뜨자마자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필자는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말 그대로 비상이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지지자였던 개인적 입장에선 상당히 충격인 사안이었지만 기자라는 본분을 생각할 때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했다. 담당 부서는 당연 정치부와 사회부. 연예부 기자인 필자하곤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이나 대형 사건사고 현장 경험이 많은 터라 사회부 후배들과 함께 봉하마을로 직접 내려가는 중책을 맡게 됐다.
그렇게 한낱 연예부 기자인 필자는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중차대한 사안의 취재 현장에 투입됐다. 동료 연예부 기자들 입장에선 ‘한낱 연예부 기자’라는 표현이 거슬릴 수도 있다. 마치 정치부나 사회부 기자가 연예부 기자보다 더 월등하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어쩌면 그 이유가 지금 필자가 쓰는 이 글의 주제일 지도 모른다.
필자를 비롯한 <일요신문> 특별취재팀에 떨어진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현장 르포 기사를 작성해야 했고 두 번째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임박 시점의 근황이었다. 검찰 출두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외부 접촉을 끊고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이를 위해 봉하마을 주민, 노사모 관계자, 비서진 등을 두루 접촉했고 24일 아침엔 봉화산에도 올랐다.
23일 내내 격분한 주민과 노사모 회원들로 인해 격정적이었던 봉하마을은 24일 새벽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23일 밤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해 부축을 받아 걸어가다 무릎을 꿇은 채 주저 않아 울먹이던 영화배우 명계남도 24일 새벽엔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봉화산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걸었던 산행 길을 따라 걸어가며 조금이나마 고인의 생각에 다가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저 뒷편 산행 길은 이미 경찰들로 인해 통제돼 있었다. 나름 등산을 좋아하는 편인지라 산세를 보니 논길을 따라 돌아가면 산 뒤편으로도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참을 걸어서 사저 반대편으로 돌아가 산행을 시작했다. 구두에 재킷 차림, 누가 봐도 등산객이 아닌 기자스러운 차림으로 시작한 산행, 다행히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두를 신고도 오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쉬운 부분은 정상 가까운 곳, 그러니까 부엉이 바위 바로 인근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더 이상의 접근은 통제로 인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산에 오르며 가장 많이 생각한 부분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취재 행태였다. 검찰 출두를 전후해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사저 인근에 몰려들었는데 집 앞뜰을 거니는 모습은 기본, 창을 통해 집 안에 있는 모습까지 촬영돼 보도됐다. 심지어 봉화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자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사저를 감옥이라 표현한 노 전 대통령은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집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고 아무도 올 수 없다”고 얘기한 뒤 “저의 집 안뜰은 제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라고 언론에 호소했다.
필자는 그 당시부터 취재진의 취재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필자는 ‘연예인 사생활 침해’로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기자에 속한다. 소위 ‘뻗치기’라 불리는 잠복취재, 이에 이은 미행취재 등을 통해 여러 건의 특종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아니 대다수의 연예부 기자들은 늘 기자의 취재에도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점'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 년 전 어느 여성 톱스타를 취재할 당시의 일이 대표적이다. 워낙 외부의 눈에 잘 안 띄는 편인데다 당시 모종의 사안과 연루돼 세간의 관심이 그 여성 톱스타에게 집중돼 있었다. 이에 필자는 사진기자와 함께 해당 연예인의 집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이미 <일요신문> 외에도 네 개 매체의 기자들이 와 있었다. 그러다보니 십여 명의 기자들이 차를 줄 세워 놓고 몰래 그녀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잠복 취재에 돌입해 일주일이 넘게 흘렀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 일찍 나와 자정을 넘겨 철수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현장에서 밤을 세웠을 정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포착됐다. 해당 연예인이 사는 집 뒤편 야산에 오르면 창문을 통해 집 안이 보인다는 점이다. 망원경을 가져와서 보니 집 안이 어느 정도 들여다보였고 해당 연예인의 모습도 가끔씩 포착됐다. 다음 날 한 매체 사진기자가 망원렌즈를 가져왔고 비로소 사진 촬영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촬영한 사진은 모두 폐기처분됐다. 아무리 취재 대상이 유명인(일각에선 연예인도 공인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인 연예인이지만 사적인 영역인 집안에 있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것은 취재 범위를 벗어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각 매체 데스크들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PlugIn]:http://three-m.kr/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nil_profile=} 있었다. 따라서 그날 이후에는 뒷산에 오르지 않았다. 쓰지도 못할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힘들게 산에 오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연예인 취재 현장에서도 기준을 지키려고 했던 '한낱' 연예부 기자는 집 앞뜰, 노 전 대통령의 표현처럼 '최소한의 인권'인 그곳에서까지 촬영을 감행하는 매스컴의 취재 열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기자 입장에선 모두 취재 대상일지라도 전직 대통령과 연예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검찰 수사 임박 등의 엄청난 이슈와 연예인의 사생활 관련 풍문 역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렇지만 검찰 수사가 임박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사저에서의 휴식까지 제한하며 개인의 인권을 훼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적 공간인 '집'은 원칙적으로 취재 공간에서 벗어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수한 경우,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호텔에 객실을 잡고 비밀회의를 하는 모습을 창밖에서 촬영하는 경우는 가능하다. 호텔 객실 역시 투숙한 뒤에는 개인 소유의 집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공간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고, 범죄 행위 등에 연관돼 있다면 취재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물론 그 기준을 명확히 하는 데 어려움이 많이 따르긴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저를 방문하는 모습은 취재 대상으로 볼 수 있다. 관건은 검찰 수사에 연루된 전직 대통령이 집안이나 앞뜰을 거닐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사적인 공간에서의 공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에 해당되느냐의 여부다.
선배 기자들에게 물어보니 그 사진이 시사 하는 바가 있다면 취재 대상이 될 수는 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연관된 상황에서 '괴로운 심경'이라는 부분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라면 보도 가치는 있다는 것. 물론 기본적인 취재 매너에서는 벗어난 일이다. 요즘 몇몇 매체에서 연예인의 열애설을 취재하기 위해 잠복 미행 등의 밀착 취재 방식을 동원하곤 하는 데 그럴 때마다 주류 언론에선 ‘파파라치적인 취재’, ‘사생활 침해 보도’라며 강하게 비난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 사안에선 주류 언론이 앞장서서 이런 방식의 취재를 했다. 연예부 기자가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부서 기자는 이런 취재를 해도 별 문제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필자의 견해는 '한낱' 연예부 기자인 필자의 좁은 소견과 부족한 경험에 의한 생각일 뿐, 한국 언론의 전반의 취재 원칙이나 관행과는 별개일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촛불 앞에 한 여성 조문객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
검찰 수사 과정에도 의문이 따랐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가십거리에 불과한 연예인 관련 수사의 경우, 관계자들이 수사 도중에 정보를 살짝살짝 흘릴 수도 있지만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인 전직 대통령 관련 수사는 보안이 생명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멍청한 필자의 생각은 정확하게 어긋났다.
과거, 경찰의 피의자 신분 연예인에 대한 정보 보호는 박수갈채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이곳에 ‘모경찰랑가’라는 글을 포스팅했을까. 예를 들어 HOT 출신 가수 이재원이 성폭행으로 구속됐을 당시, 담당 경찰은 이재원의 구속 여부에 답변하기는커녕 아예 이재원이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정도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고 장자연 문건 파문에선 경찰이 얼마나 피의 사실 공포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여론이 아무리 들끓어도 고 장자연 문건에 오른 고위층 인사들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경찰은, 기자들의 거센 요구에 ‘피의사실 공표는 불법’이라며 맞섰다.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도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중간수사발표에선 이미 공개한 발표문조차, 문서로는 배포하지 않았을 정도다. 글자 하나로 인해 명예훼손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데, 이 얼마나 피의자의 인권을 생각하는 선진 경찰의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노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다. 수사 도중에 검찰을 통해 알게 모르게 각종 수사 정보가 흘러나왔고 언론은 이를 보도했다. '피의 사실 공표죄'와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개념들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어찌 보면 한낱 연예부 기자들의 취재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정치부나 사회부는 보안이 철저한 전직 대통령 수사 관련 정보도 척척 빼내는 데 연예부 기자들은 한낱 연예인 관련 가십 사건 정보도 빼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데 고 장자연 문건 파문의 경우 방송사와 일간지 사회부가 총출동한 사안이었음을 감안하면 반드시 연예부 기자가 무능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연예계가 그만큼 경찰의 인권 보호가 잘 이뤄지는 영역이라는 얘기일까.
봉하마을에 있는 내내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번처럼 기자라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웠으며 시민들에게 냉대당한 취재 현장은 처음이었다. 마을 주민이나 노사모 회원들은 몇몇 보수 언론사를 집중적으로 비난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언론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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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投身)의 삶을 살단 간 노무현
“주님, 당신의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
제 앞에 당신의 길을 바르게 놓아 주소서.
그들 입에는 진실이 없고
그들 속에는 흉계만이 들어 있으며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들 혀는 아첨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그들이 죗값을 받게 하소서.
자기들의 음모에 빠지게 하소서.
그들의 죄악이 많으니 그들을 내치소서.
정녕 그들이 당신을 거역하였습니다.”(시편 5, 9-11)
노무현 당신은 바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민중의 승리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우리는 한순간도 TV에서 눈을 띌 수 없었고,
동시에 터져 나온 함성은 모두를 눈물짓게 했습니다.
시대에 투신(投身)한 당신이, 아니 당신을 선택한 우리가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실로 민중의 값진 승리, 그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
그분이 당신이었습니다.
민중은 노란 손수건을 흔들었고, 돼지 저금통으로,
지나온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항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작은 진정성 하나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슴 벅찬 현실을
우리에게 선물로 선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도취는 여기까지였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니 승리를 맛보고 살아보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해 보지만,
역사에 대한 미숙한 경험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유린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벌이는 교묘한 술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앞뒤말 자르고 당신을 옥죄었습니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로 시작해서 ‘놈현스럽다’면서 당신을 밀어내었습니다.
당신은 말만 잘한다고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 후론 당신이 무슨 말만하면 말로 뭉개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음이 아픈 건, 나도 거기에 동조했었다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그들의 얄팍한 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당신을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이런 추도사를 했습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4. 3사건 추도사 중에서)
당신은 역사의 상처를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중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민중의 가슴 속에 묻어 있는 삶의 질곡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당신은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언제나 내려오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대통령스럽지' 못하다고 비난받았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민중을 분리시키려는 이들의 분열책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철저히 분리시켰고, 우리는 멍청히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입니다.
그들이 당신만을 끌고 갈 때, 우리는 당신이 살아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당신은 영영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진정성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시대의 아픔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거대한 권력과 싸우고 있다는 심각한 상황을 외면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죽여 버렸고, 그래서 상실했고,
진정 당신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생전에 감명 깊게 본 영화로 ‘쉰들러 리스트’를 꼽았습니다.
그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한 생명의 희생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당신의 투신(投身)은 온 몸으로 당신에게 옥죄어 왔던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버리고자 했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그림자, 지금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 슬픔의 이유는 당신의 죽음을 방기(放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일은 4대강을 살리고 곤봉에 머리가 터지고 생명이 불에 타죽고
방송장악 음모에 노출되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당신으로 인해 얻었던 자유를 앗아가고 있습니다.
빼앗기고 보니 당신의 위대함이 새삼 크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못난 당신의 민중입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예감(豫感)이라도 했듯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낙향하였습니다.
촌부, 당신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곳이 삶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당신이 서슴없이 선택해 갈 곳이 거기뿐이었다는 것을 아는 당신,
당신은 진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 그 세상은 당신이 시대에 투신했던 세상이고,
이젠 역사에 투신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당신은 세상에 투신을 하였고, 우린 그 의미를 이제사 깨닫습니다.
투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몸으로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몰려드는 저 인파들을 보며, 저들 마음속에 심어준
사람 사는 세상의 의미가 이미 던져져 있었음을 봅니다.
당신은 자신을 세상에 던짐으로써 세상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보하렵니다.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강한 열망을 얻었습니다.
하나씩 나아가면서 민주와 인권과 자유와 통일을 향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당신의 고귀한 뜻이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당신은 한 점 부끄러움을, 자신의 온몸을 투신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자신의 존엄을 지켰습니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편히 가십시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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