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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가계도

은행골 2010. 12. 13. 21:53

 

제3대 태종 가계도

태조 - 신의왕후 한씨

제 3대 태종

5남 : 방원,정안대군(1367-1422)

재위기간 : 1400.11-1418.8(17년 10개월)

부인 : 12명 / 자녀 : 12남 17녀

1부인

원경왕후 민씨

4남4녀

2부인

효빈 김씨

1남

3부인

신빈 신씨

3남6녀

4부인

선빈 안씨

1남

5부인

의빈 권씨

1녀

6부인

소빈 노씨

1녀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제4

대 세종)

성녕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경녕군

성녕군

온녕군

근녕군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익녕군

정혜옹주

숙혜옹주

7부인

숙의 최씨

1남

8부인

안씨

1남2녀

9부인

최씨

1남

10부인

김씨

1녀

11부인

이씨

1녀

12부인

?

1녀

회령군

 

혜령군

소숙옹주

경신옹주

후령군

 

숙안옹주

 

숙순옹주

 

소선옹주

 

 ● 주요 정치사

         1. 제2차 왕자의 난과 방원의 세자 책봉

         2. 조선의 개혁 작업, 태종의 등극

         3. 태종시대의 주요 5대 사건

             ① 민무구 형제의 옥, ② 육조직계제 단행, ③ 거북선 개발, ④ 신문고 설치, ⑤ 한양 천도

         4. [태종신록] 편찬

 ● 역사 개요

▣ 태종 (太宗)

  자 유덕(遺德). 휘 방원(芳遠).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양녕대군 (讓寧君大)이고, 제3자가 세종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1392년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으며, 더군다나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李佇)를 귀향조처하였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李茂), 윤목(尹穆), 유기(柳沂) 등 을 각각 목 베었다. 그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 (閔無悔)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하고 사전(私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포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또 지방제도로 1403년과 1406년에 고려말 이래의 문란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이르러서야 개편하였다. 즉, 이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각각 고치고 아울러 군·현의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산(山)·천(川)]자 등으로 개명하면서 1유도부(留都府), 6부(府), 5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牧), 74도호부, 73군, 154현의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해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도안무사 (都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 영길도를 황해, 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밖에 1409년에 전라도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소·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하고,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으며, 1404년에는 응양위(鷹揚衛)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內上直)을 내금위(內禁衛)로 개편하면서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특지(特旨)로써 기능을 헤아려 서용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 지휘권까지 장악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하여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게 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였다. 그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전장하게 하였다. 사법·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濫訴) ·월소(越訴)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巡軍制度)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近衛隊)로서 모역(謀逆)을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양전사업으로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量田)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 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보충·조운타개·신권억압과 관련하여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여 나갔는데, 1401년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이듬해에는 고려말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寺院田)을 혁파하여 5만∼6만결을 새로이 확보하였고,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하여 군자전으로 하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하여 공·사천인 자손과 기첩(妓妾)과 천첩의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감하고, 군자전에서의 과전절급을 중지,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으며, 평양, 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감하였다. 한편,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1404년 송도(松都)에서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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