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국내역사

한음과 오성의 우정에 대한 야화

은행골 2011. 9. 1. 09:05

 

       한음과 오성의 우정에 대한 야화


시중에는 한음과 오성에 관해 수많은 야화들이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이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며 두 분은 어릴 때

부터 친구가 아니고 같은 해(1580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부터 친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2001년도‘국방저널’이나 시중에 나도는 일부 야화집 중에 두 분이 그 보다 몇 해 전에 사귀었다는 글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원전을 밝히지 않아 이 또한 야화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지만 모든 정황이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면서도 재미있게 꾸며진 내용임으로 여기에 소개한다. - 편집자

 

한음이 열여섯, 오성이 스물한 살이 되던 선조 9년(1576년) 겨울, 두 사람은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했다. 진사 초시(進士初試)였는데 한음은 장원, 오성은 3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2년 뒤에 응시한 대과 복시(大科覆試)에서는 어찌된 셈인지 두 사람 다 낙방이었다. 과거(대과복시)에 낙방한 인연으로 친교를 맺은 항복과 덕형은 다음해 봄에 함께 공부를 하기 위해 관악산(冠岳山) 화장사(華藏寺)에 올랐다.


어느 날, 항복과 덕형은 화장사 뒷산 염불암(念佛庵)에 올라, 그 옛날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맏형이자 세자로서 장차 보위에 오를 양녕대군(讓寧大君)과 같이 임금자리를 막내아우 충령대군(忠寧大君)에게 양보하기 위해 북을 치며 염불을 했다는 그 자리에 앉아, 이제라도 둥둥둥 북소리를 다시 듣는 듯 양녕, 효령 두 대군의 당시 심사를 헤아리며 각자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항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보게, 한음."

한음(漢陰)은 덕형의 호(號)였다.

"왜 그러나, 필운."

 

필운(弼雲)은 항복의 호였다. 항복이 장가들면서 형들 밑에 얹혀사는 사위가 딱했던지 그의 장인 권율이 따로 사위집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 집이 필운산 아래에 있은 연유로 붙여진 호였다. 뒷날 항복은 백사(白沙)라는 호를 더 많이 쓰게 되는데 말년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오성대감'으로 더 많이 불리기도 했다.  


항복이 염불암 경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160년 전 효령대군께서 이 자리에 북을 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라의 장래였을까? 아니면 형제간의 우애였을까?"

"그야…"  덕형이 대답을 망설였다. "둘 다겠지. 우애에 대한 배려 없이 어찌 나라만 생각할 수 있으며 나라에 대한 생각 없이 어찌 우애에만 연연해 하셨겠나?"

"그러셨겠지. 그렇다면 누가 더 훌륭하다고 보는가? 자신에게 내려질 왕관을 아우에게 물려준 두 분 대군이나 그 왕관을 물려받아 어진 정치를 펴서 나라를 크게 융성시키신 세종 임금이나…"

"글쎄."

"두 분 형님이 더 훌륭했다고는 생각지 않나? 누구나 임금이 될 생각은 가질 수 있지만, 임금이 될 수 있음에도 그 자리를 탐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세종 임금께서 덜 훌륭하다는 얘기는 아닐세. 우리 역사 속에서 그만한 명군이 어디 흔하던가?"

"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세종 임금께서 펴신 치적에 대해 폄훼(貶毁)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물론이지. 세 분 중에 훌륭하지 않으신 분이 누구 시겠나.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인간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싶네. 감히 꽃이 흉내 내겠나, 벌과 나비가 흉내 내겠나…"

"그렇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지."

"그렇지 못한 경우?"

대답 대신 덕형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알아채고 항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조 임금이 또 계시군."

"어디 세조 임금뿐이겠나?"

"양녕이나 효령과 세조 임금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구름과 진흙의 차이일세. 두 분 대군께서는 임금 자리를 아우에게 양보하느라 한 분은 거짓 미치광이가 되셨고, 또 한 분은 북을 치며 염불을 하셨는데, 세조께서는 임금이 되고자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셨으니 사람의 값이 그렇게 다르군."

항복이 분개해하자 덕형이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덕형이 말했다.

"자네 말이 옳네. 사람이란 의를 앞세우고 사사로운 욕심 따위야 훌훌 벗어던질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제 욕심을 앞세우고 의를 저버리면 그게 짐승이지 어디 사람인가. 그러니 우리도 장차 세상에 나가면 혹시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니 마음에 채찍질을 게을리 말아야겠네."

"아무렴, 그래야지. 사람의 일생이란 긴 것 같아도 길게 보면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인데 그 짧은 동안에 찾아 누릴 게 뭐가 있다고…결국 헛된 욕심이나 채워서 얻어낼 게 무엇인가. 세조께서 그렇게 악한 이름을 후세에까지 끼치며 얻은 임금 자리가 겨우 13년…그 13년이 천세 만세를 뒤엎을 만큼 그리 대단한 세월이던가…"


이들은 이렇듯 진지한 대화의 시간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느 비 오는 밤이었다.

밖에는 빗소리가 자욱했다. 뚫어진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촛불을 흔들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넘기던 책장을 덮고 잠시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항복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일었다.

"한음!" "…"

책에 눈길을 꽂은 채 덕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들은 것일까, 항복이 다시 불렀다.

"한음!" "…"

대답 대신 덕형이 돌아보았다.

"자시(子時;밤12시)가 넘었겠지?"

"글쎄…,  졸리면 먼저 자지 그래."

"아니, 졸려서가 아니고…" "…"

덕형이 눈으로 물었고 항복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 크게 놀려줘야 할 텐데...

워낙 점잖은 친구였다. 언제나 신중했으며 조용조용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장난을 싫어했고, 제 또래 아이들과 놀 때도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쓸데없는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아서 함께 놀던 아이들도 감히 놀리지 못했던 사람이다. 나이 열한 살 남짓에 걸음걸이나 말씨가 이미 어른 같았으며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엄숙하고 무게 있는 모습으로 책을 읽은 모습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총각 정승"이라 불렀다.

이것이 항복이 덕형에 대해 아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지식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항복이 주로 물었고, 덕형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는 정도였다.

농담 잘하고 장난이 심한 항복과 성격은 달랐으나 둘은 처음부터 의기가 투합했다.

그것은 두 사람 스스로는 물론 누가 생각해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크게 한번 놀려줘야 할 텐데….

항복은 비마저 퍼붓는 이 좋은 기회를 다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음!" 항복이 다시 말을 걸었다.

"말하게. 귀는 열려 있으니까."

"자네 무섭지 않나?"

"무서워? 뭐가?"

"비가 저렇게 퍼붓고…천둥 번개가…"

"천둥소리야 처음 들어보는 것도 아닌데 뭘."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지 않나? 하얀 소복의 머리 풀어헤친 여자귀신이…"

"그런 귀신이 있으면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네."

"이 사람, 지금 당장 이 자리에 그런 귀신이 나타나도 큰소리 칠텐가?"

"날 겁쟁이로 아는군."

"아니란 말인가? 그럼 증거를 보여 보게."

"증거? 어떻게 하면 증거가 되는데…"

"그럼 우리 내기 한번 해볼까."

"내기? 무슨 내기?"

"대웅전 뒷곁에 가면 명부전(冥府殿)이 있는 거 알지?"

"알지."

"거기 십대왕상에 대추 한 알씩 올려놓고 오기."

"대추?"

"주지스님께서 먹으라고 주신 대추가 좀 남아있지 않나."

"좋아."

"해 볼 텐가?"

"해보지."

"괜히 후회하는 거 아닌가?"

"날 계속 겁쟁이로 모는군."

"좋아. 자네가 다녀오면 나도 다녀옴세. 나는 다시 그 대추를 집어오기로 하지."

"괜찮은 방법일세."

이렇게 해서 내기는 결정되었다.

내기라고 해야 담력시합인 만큼 그 으스스한 곳에 한 사람은 대추를 놓고 오고 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집어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 다녀오겠네."

덕형은 별로 주저하는 기색 없이 방문을 나섰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갈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쳤으나 빗물이 튀어 빠른 속도로 옷이 젖어갔다. 앞뒤도 분간할 수 없이 주위는 칠흑으로 어둡고 비까지 퍼부어, 명부전은 그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덕형은 곧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다른 날로 바꿀걸. 달이 뜬 밤이나 별이라도 많은 밤이라면 그래도 이렇게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덕형은 생각했다. 항복이 이 밤중에 왜 이런 장난을 생각 해 냈을까. 단순히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내 담력을 시험해 보이기 위해서일까.

명부전이 가까워오자 두려운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명부전의 십대왕상은 밝은 낮에 보아도 으스스 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밤에, 비가 퍼붓는 이 밤중에 그 앞에 대추 한 알씩을 놓아야 하다니. 그러나 두려울 게 어디 있느냐. 나는 사람이고 그것들은 한갓 인간이 만들어 놓은 나무토막인 것을.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가며 덕형은 이윽고 명부전에 올라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밤이라서 그런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덕형은 명부전을 살폈다. 저만치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보이고 그 앞에 희미하게 펄럭이고 있는 촛불이 보였다. 덕형은 십대왕의 손에 대추를 한 알씩 차례로 놓아갔다.

하나, 둘, 셋, 넷…아홉, 열.

그런데 하나가 모자랐다. 십대왕이 열이 아니라 하나가 더 있었다. 이상했다. 내가 잘못하여 대추를 두 개 놓은 곳이 있었던가. 덕형은 돌아서서 십대왕상을 다시 하나하나 확인해갔다. 역시 열 하나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십대왕이 열 하나라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다시 세어보았지만 열 하나에는 변동이 없었다. 덕형은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십대왕상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이때였다.

"나도 하나 다오!"

"…"

또랑또랑한 목소리.

일시에 머리칼이 곤두서고 심장이 얼어붙는 순간이었다. 십대왕이 말을 하다니.

다시 발걸음을 떼어 놓으려는데 등뒤로 목소리가 꽂혀왔다.

"나도 하나 다오." "…"

"나는 왜 안주느냐. 나도 하나 다오."

해괴하고 두렵기조차 했으나 덕형은 용기를 내어 한마디 했다.

"누구냐? 누군데 사람에게 말을 하느냐?"

"대추나 하나 다오."

"없다. 열 개밖에 안 가지고 왔다."

"하나 다오."

"없다. 정 먹고 싶으면 옆에 놈과 나누어 먹거라."

십대왕이 열 하나라는 것도 괴이하고 대추를 달라고 떼를 쓰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으나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덕형이 다시 발걸음을 떼어놓으려는데 이번에는 십대왕이 목덜미를 잡아왔다.

"못간다. 대추를 주고 가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이놈! 일개 잡귀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느냐. 놓아라." 하며 덕형이 팔을 후려치자 "어이쿠!"하며 십대왕이 비명을 질렀다.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아니, 자네…"

항복이었다. 불빛 앞으로 나서며 항복이 아픈 팔을 주무르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무리 잡귀이기로서니 이렇게 아프게 팔을 내리치는 법이 어디 있나?"

"십년감수했네. 자네야말로 그렇게 사람을 놀래키는 법이 어디 있나?"

"전혀 놀래는 기색이 아니던데. 능청부리지 말게. 괜히 나한테 유감이라도 있어서 나라는 걸 미리 알고 골탕을 먹인 게 아닌가?"

"장난이 좀 지나쳤네. 정말 내가 이 자리에서 기절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자네의 느닷없는 공격에 내가 기절을 했으면 그건 또 어쩌구?"

결국 내기는 무승부. 항복과 덕형은 이렇듯 공부하는 틈틈이 마음의 여유도 부려가며 아울러 우정도 더욱 다져갔다.


그 해 여름이었다. 때는 복중(伏中)이라 날이면 날마다 폭염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늘을 찾으며 물처럼 땀을 줄줄 쏟았다. 감히 부채 따위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지독한 더위였다.  화장사의 항복과 덕형도 이 여름의 더위가 독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앉아 책만 읽는데도 등에서 줄줄 땀이 흘렀다.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해야 할 우리가 이까짓 더위 하나 못 물리친대서야 말이 되는가. 우리 한번 싸워보세."

"싸워? 더위하구?"

항복의 말에 덕형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싸워야지. 어디 우리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천군만마뿐이겠나. 괴롭히는 놈이 있으면 응당 쳐부숴야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일이 아니겠나?"

"기껏 장부가 할 일이 더위 쳐부수는 일이라…" 덕형이 계속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농담이 아닐세. 이까짓 더위쯤 못 참아서 그늘이나 찾고 부채에나 의지한다면 장차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이며 또 미래에 닥쳐올 난관인들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우리 그러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 한번 싸워보세." 항복이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 항복과 덕형은 방문들을 꼭꼭 닫고 겨울 솜옷을 있는 대로 꺼내 입었다.

전투에 나서는 장수가 갑옷을 찾아 입듯 그렇게 중무장을 한 두 사람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벽을 향해 앉았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물 속에 들어가 숨을 안 쉬고 얼마나 오래 참는가를 내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된 싸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솜옷을 온통 적실 기세로 송송 땀이 솟아 몸 여기저기에 내(川)를 이루고, 숨은 왜 이리 또 가빠오는지.

그러나 두 사람은 눈을 꼭 감은 채 조그만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기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대로 그냥 밀고 나가느냐. 이쯤에서 그대로 물러서느냐.

이때 절의 주지(住持)가 항복 일행이 묵고 있는 방 앞을 지나다가 방문이 모두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아니, 신발은 있는데 서방님들이 어딜 가셨나." 하며 문을 열다가, 방안에 두 사람이 겨울 솜옷을 걸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fp졌다.

주지 스님은 차마 말을 걸어볼 수도 없어 슬그머니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서방님들이군. 이 더운 날에 솜옷을 걸치고 좌선을 하다니." 이윽고 한 식경이 더 지났을까,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항복이 덕형을 돌아보았다.

"어때.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둘까. 이만하면 더위란 놈도 그만 무릎을 꿇었겠지?"

"무릎만 꿇었겠나. 지금쯤 댓돌 앞에 엎드려 석고대죄하고 있을걸."

항복과 덕형은 땀으로 질퍽거리는 솜옷부터 우선 벗어 던졌다.

일시에 땀이 잦아들며 휩싸오는 한기(寒氣). 한겨울 설한풍(雪寒風)이 이러할까.

방문을 열었다. 다시 한기를 느꼈다. 여름이 이렇게 시원할 수 있다니.

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주지 스님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아니, 서방님들 덥지 않으시오. 솜옷을 그렇게 입으시고 방문까지 닫고 계시니 정말 장하시오. 서방님들은 아무래도 예사 사람들이 아닌 것 같소."


이렇게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겨울이 왔다.

동지섣달 추운 겨울에도 항복과 덕형은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베옷을 입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장시간 좌선을 하는 것으로 추위와 맞섰다.

이렇듯 두 사람은 심신을 단련한 나머지 뒷날 나라의 재상에 올라서도 어떤 어려움도 막힘이 없이 잘 수행하며 노경에 이르기까지 겨울에 더운물을 쓰지 않고 여름에는 부채를 손에 잡지 않고 지낼 수가 있었다.


다음해인 1580년 항복과 덕형은 드디어 과거에 급제 했는데 항복은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로, 덕형은 부묘별시(咐廟別試) 을과(乙科)로 시험에 통과했다.

이때 항복의 나이 25세, 덕형의 나이 20세였다. 항복과 덕형이 처음으로 맡은 관직은 승문원 부정자였다. 종9품으로 나라의 외교문서를 취급하는 말단 직책이었다.

항복과 덕형의 벼슬길은 순조로워서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홍문관 저작, 박사,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고 이어 1586년부터는 항복이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이조정랑,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는 도승지에 올랐다.

덕형도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이조정랑, 홍문관 대제학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1582년 6월에는 임금 선조(宣祖)가 강목(綱目)을 수강코자 하여 항복과 덕형이 함께 뽑히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홍문관 대제학이었는데 이이가 임금의 명을 받고 두 사람을 함께 추천했던 것이다.


이 후 한음은 대부분의 관직에 조선왕조 최연소의 기록으로 올랐으며 서른여덟 살에 우의정, 마흔두 살에는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것도 왕의 인척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연소 기록이다. 한음은 선조가 죽고 그 뒤를 이은 광해군이 폭정을 일삼자 어진 정치를 베풀어 달라고 간언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죽었다.

이항복 역시 사십대 초반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광해군의 폭정에 대해서 과감하게 간언을 했다가 결국 함경북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배지에서 다시는 풀려나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유유자적하는 심정으로 귀양 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조 임금이 용상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있는 꿈을 꾸었다.

그 광경은 지난날 선조 임금 생시의 어전 회의 모습과 똑같았다.

선조 임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광해가 저토록 무도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신들의 의견을 말해 보라."

그러자 이미 유명을 달리한 이덕형이 나서는 것이었다.

"전하, 이항복이 근처에 와 있으니 불러다가 여쭤 보시옵소서."

"오, 그게 좋겠군."

이덕형의 말을 들은 선조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꿈을 깬 이항복은 곧 고향에 있는 아들들을 불러다 놓고 말했다.

"내가 오래지 않아 이 세상을 뜨게 될 터이니 그렇게 알라."

과연 그 이틀 뒤에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마음을 나누고 평생 사귄 친구란 이런 것이다. 유명을 달리하고서도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한음묘지(漢陰墓誌)와 한음언행록 (漢陰言行錄)

-   한음상공묘지(漢陰相公墓誌) 중에서

                                                    오성 부원군, 백사 이항복(鰲城 府院君, 白沙 李恒福)


계축년(1613) 10월에 한음이 용진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금은 애도하며 복관을 명했고 온 백성이 슬퍼하며 사대부나 상인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부조를 들고 그의 서울 집 문전에 줄을 이었다.

이 때 나는 그와 같은 죄목으로 노원에 머물러 있다가 부음을 듣고 급히 용진으로 달려가 염습 때 도착하니 상제들이 통곡하며 나를 맞았다.

어느 조객이 나에게 물었다.

“지금 한음은 탄핵을 받아 극형에 처할 것을 청원 당하고 있는데 그가 별세하자 임금과 온 백성이 이토록 슬퍼하니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내가 답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성인은 살아 있을 때 지조를 빼앗을 수 없고 죽어서는 그의 명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했는데 아마 한음이 이 말에 합당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나라안에서는 물론 명나라 조정과 왜적들까지도 그의 인품에 머리를 숙였으니 그 사람들도 한음의 부음을 들으면 매우 애석해 할 것입니다.

한음의 덕망이 이러한데도 한 나라안에서 같은 시절에 대신을 지낸 사람들이 그를 모함하여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으니 사람의 심성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먼저간 친구의 염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슬픔에 잠겨 있는데 한음의 둘째  아들 여벽이 찾아와 울며 말하기를 “선고께서 생전에 늘 말씀하시기를 당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분은 오성대감 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이제 허무하게 세상을 버리셨으니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지어 주실 분은 오직 대감 뿐 이십니다. 부디 대감의 글을 받아 선고의 묘에 묻고자 합니다.” 하였다.

나는 답하였다.

“그대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나 또한 진심으로 의견을 나눌 친구가 없어지게 되었구나. 나는 한음보다 나이로 치면 조금 위지만 덕이나 재주로 말하면 한참 아래였건만 세월이 태평할 때는 같이 홍문관에서 학문을 닦았고 전쟁 중에는 서로 바꿔가며 병조를 맡았었다.

평생을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다가 이렇게 끝을 맺게되니 비통한 마음 뿐 이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책을 맡아가면서 나를 이해 해주는 이는 그대 아버지 뿐 이었고 나는 평생 그를 존경하며 따랐으니 이제 내 어찌 친구의 행적을 기꺼이 기록해 주지 않으랴“ 하며 그의 행적을 회상하며 적었다.(중략)

한음은 천품이 매우 고상하여 항상 정신이 맑았으며 겸손하고 절제된 생활로 자신의 재주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만일 좋은 세상을 만나 그의 뜻을 모두 펼칠 수 있었다면 만백성이 그의 공덕을 입어 편안해지고 그를 공경했을 것이다.

한음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 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그의 행적을 기록하려니 슬픔을 가눌 수 없어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그의 덕으로 나의 속됨을 덮고 그의 말을 훔쳐 내 흠을 숨기면서 이 글을 써서 친구의 무덤에 묻노라.


- 한음언행록 (漢陰言行錄) 중에서

                                                        연평부원군 이귀 (延平府院君 李貴)

나는 어려서 한음과 한마을에 살았는데 공은 나보다 네 살이 아래였다.

윤우신 (尹友新)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며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문장이 뛰어나고 행동이 숙성하여 아이들끼리 놀 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겉으로 내세우질 않아서 사람들은 그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학식과 재주를 알아보고 매우 놀라워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재주와 행동은  타고난 천성이었기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곳마다 주위사람은 그를 총각정승이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한번은 그를 비방하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발설자를 가려내어 해명을 듣고자 하였으나 그가 나서서 정색을 하며 말렸다.

“이는 나와 가까운 사람의 소행이 분명하니 그 이름을 내가 알면 친구하나를 잃게될 것이고 발설자 또한 무안하여 나를 피할 것이니 모르고 지내는 것이 서로 좋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내게 해로울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며 다시는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병자년(1576)에 나는 숙부를 따라 경상도 상주로 내려가면서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 후 한음은 시험을 볼 때마다 좋은 성적을 보여서 젊은 나이로 그 이름이 온 나라에 진동했으나 나는 불행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갈수록 형편이 어려워 부모봉양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나의 형편을 소문으로 듣고는 매번 봉록을 쪼개 전해주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던 내 부모처자를 살려주었다.

나의 스승(율곡 이이)이 무고를 당할 때 나는 스승을 모욕하는 무리들에 맞서 그들을 비방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기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게되어 가까운 친구들도 나를 멀리 하였으나 한음과 오성만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대하였다. 

(율곡의 제자들은 대개 서인이었고 퇴계의 제자들은 대개 동인이었다.   이 때는 동인들이 득세하여 일부학자들이 율곡을 헐뜯는 일이 자주 있었다.)

더구나 내가 스승을 모욕한 한음의 장인(이산해)을 심하게 비방하였음에도 한음은 그 일로 내게 딴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느 해 여름에 내가 서울에 갔다가 염병에 걸려 다 죽게되자 한음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궁핍한 가운데서도 한 달 반 동안 정성껏 돌봐주어 나를 살려내었다.

그는 집안살림에 마음을 쓰지 않아 생활이 늘 궁하였는데도 더 어려운 친구들에게 봉록을 나누어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면 노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그의 첩이 갖은 고생을 다하며 노비들을 근근히 먹여 살렸는데 어느 때는 머리를 잘라 팔아 연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의 인품이 이러한데도 말년에 그를 모함한 자들은 그를 가리켜 행실이 탐욕스럽고 불충불효하다 하였으니 참으로 경우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는 늦게서야 문과에 들어 (한음이 영의정이던 1603년에 이 귀는 거의 50이 가까워서 문과에 장원 급제 하였다.) 한음의 인척들과 같이 합격하였건만 그는 제일 먼저 내게 찾아와 나의 노모에게 잔을 올리고 같이 기뻐하였다.

1607년 내가 백천 군수의 명을 받아 임지로 부임하려는데 나와 우리어머니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장수를 기원하는 잔치를 베풀어주니 나의 노모께서 감격하시어 한음상공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늘 칭찬하셨다. 1612년 내가 숙천에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부지런히 집에 도착해 보니 한음이 모든 장례준비를 갖추어 놓고 나를 맞았다.

나는 성질이 남과 타협 할 줄을 몰라서 평생을 주위의 핍박 속에서 살아 왔는데 한음만은 끝까지 정성으로 나를 대해 주다가 먼저 갔으니 도대체 내게 취할 것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먼저 세상을 버린 옛친구 생각이 간절하여 비탄의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 이 항 복 (1556 - 1618)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자상(子常) 또는 백사(白沙)

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에 급제한 한음과 승문원 부정자로 같이 관계에 진출하면서 30 여 년간 뜻을 같이하여 절친하게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송한 공로로 1등 공신에 훈록되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618년 인목대비의 폐비를 극력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 이  귀 (1557 - 1633)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묵재(黙齋)로서 1603년 문과에 급제하여 백천군수 등을 지냈다. 평산부사 때인 1623년 두아들 이시백, 이시방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3부자 모두 공신에 훈록되었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서울 남대문박 송경현(誦經峴)에서 살았는데 한음과 이웃에서 같이 자라면서 같은 서당에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