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국내역사

백사 이항복의 퇴근길에

은행골 2011. 9. 1. 11:13

백사 이항복의 퇴근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가 탄 말 앞으로 여자 하나가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수행하던 하인이 “......감히 누구 행차신데....” 꾸짖으며 밀쳐 그만 그 여자가 땅바닥에 엎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백사는 여럿이 보는데서 그 하인을 불러 엄중히 야단칩니다.

“내가 정승으로 있으면서 나로 인해 단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나의 수치다. 오늘 너희가 길가는 사람을 밀쳐 땅에 엎어지게 한 짓은 아주 잘못된 일로 앞으로는 조심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머리 조아린 하인들은 그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 되는가 싶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대문 앞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아까 그 여인이 집안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악을 쓰면서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이제는 종놈들 풀어 행패까지 부려가며 길가는 사람을 엎어지게 했으니 이러고도 네가 정승이 되어 나랏일에 잘한 것이 뭐있다고 위세를 부리느냐? 네 죄는 당장 귀양 보내야 마땅하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쌍욕을 해대며 아주 발악을 하는데도 백사는 못들은 척 하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하인들은 모두 얼굴도 못 내밀고 문안에 틀어박혀 꿈쩍하지 못합니다.


이 때 마침 손님이 와 있다가 난데없는 이 소란에 해괴하다 싶어 백사에게 묻습니다.

“아니 대감, 저 여자가 지금 누구한테 욕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백사 빙그레 웃으면서 “아, 이 집안에서 머리가 허연 늙은 물건이 나 말고 누가 있겠소?” 그 말에 손님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니 그럼 내쫒아 버리지 않고 왜 저렇게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까?”  하니 백사는 “내가 먼저 잘못을 했으니 저 여인이 성을 내고 욕하는 것은 당연하네. 분이 풀리도록 실컷 욕을 하고 가라고 내버려 둬야 마땅한 일 아니오?” 이 말에 훗날 사람들이 말하길, “참으로 대신의 도량이 크다” 했답니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 했는데 누구나 알면서도 그걸 절제하기는 쉽지 않나 봅니다. 최소 단위의 사회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오버하는 나의 권력행사부터 위임받은 공직사회의 그 많은 불나비떼가 펼치는 한여름밤의 하루살이 막춤까지.....그러다가 꼭 뒷탈이 나고 그걸 보고서도 다시..........하기야 요즘은 백사 이항복처럼 머리 허연 멋진 늙은이는 기대하기도 어렵겠지요. 하도 염색약이 좋은 게 많이 나와서.......그러나 염색약으로 머릿칼은 위장(?)할지 몰라도 검은 속마음까지 바꾸지는 못하는 법, 일찍이 공자께서도 사람이 늙어서는 ‘戒之在得’하라 했는데 아무래도 이 ‘得’이 보통 ‘得’이 아닌가봅니다. 또한 장사라는 게 利得을 보다가 손해도 보는 게 상대성을 가진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