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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가(이산 저산..) -조상현 명창

은행골 2007. 5. 1. 14:21
 



  


 사철가(이산 저산..) /조상현 명창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있나.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 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 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 오면 낙목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보면 월백 설백 천지백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내 청춘도 아차 한 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어~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네 한 말 들어보소
 
인생이 모두가 백 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허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 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 생전의 일배주 만도 못허느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늘어진 계수나무 끝끝어리에다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 허는 놈과 부모불효 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허는 놈,
 
차례로 잡어다가 저 세상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 앉아서
 
한 잔 더 먹소 덜 먹게 허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세월이 유수로다. 어느덧에 또 봄일세'라는 옛 시조의 글귀처럼 봄이 오면 또한 여름이 멀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어느덧 세상은 가을과 겨울을 지나서 또 하나의 세월의 마디인 한 해라는 허망한 연치(年齒)를 더해 주게 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동토의 한 대 지방이나 무더운 상하의 나라가 아닌 축복받은 온대에 위치한 우리에게 이 네 계절의 의미란 여간 각별한 게 아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화는 주로 온대에서 엮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사계절의 개성적인 변화가 인간의 사고, 특히 우리의 심성과 서정적인 시심(詩心)에 끼치는 무형의 영향이란 더없이 넓고도 진하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엄연한 진실이다.

그래서 사계절의 변화는 인간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선사하고, 인간은 이 계절의 선물인 다채로운 감성을 토대로 해서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구(詩句)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요 예술이다.

일찍이 맹사성(孟思誠)은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라든지 혹은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草堂)에 일이 없다'라고 춘하추동의 경관을 노래한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남겼다.

이렇듯 우리의 시인 묵객 들은 예로부터 금수강산으로 일컬어지는 이 땅의 사계의 아름다움을 붓으로 소리로 상찬해 왔다. 판소리의 명창 김연수(金演洙)가 살아 생전에 사철가를 만들어 불렀던 것도 아마 이 같은 한국적 풍류의 맥에 십분 물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산림 풍경 두른 곳, 만자천홍(萬紫千紅) 그린 병풍 앵가접무(鸚歌蝶舞) 좋은 풍류, 철 가는 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고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쿠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고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화시(勝花時)라 예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개(景槪) 없을손가. 한로상풍(寒露霜風)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잖는 황국단풍(黃菊丹楓)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月白雪白) 천지백(天地白)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일레라. 그렁저렁 세월이 가면 어느듯 또 하나 연세는 더하건만, 봄은 찾아왔다고 즐기더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만 이 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는가.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人壽瞬若) 격석화(擊石火)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아, 늙어지면 못 노느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하면 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하고 한가할 때 틈타서 걸기를 하며 놀아보자.


50∼60년대의 판소리계를 석권하던 김연수 명창이 지어 부른 단가, 사철가의 내용이다. 사계절을 주제로 한 음악 하면 으레 우리는 비발디의 악곡 사계를 연상하지, 여기 김연수의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아니 김연수의 사철가를 떠올리기는커녕 사철가라는 우리의 노래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얼른 생각해 보아도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비단 외국의 예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가(詩歌) 중에도 사계절을 읊조린 작품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김연수 명창의 사철가는 인생론적인 애상을 짙게 풍겨 주어 단연 우리의 심금을 적셔 주는 엄지의 위치에 선다.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은 인생은 비록 백년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석화(擊石火)의 순간, 즉 번쩍이는 부싯돌의 순간과 같다고 전제하면서 계속 인생 행로의 덧없음을 노래해 가는 저의는 인생을 허무주의적 페이소스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월백설백(月白雪白) 천지백(天地白)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라고 자탄한 사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철가는 인생과 자연의 관조적 합일을 바탕으로 우리의 숙명적 유한성을 담담하게 객관화한 데 더욱 공감되는 감흥이 있다. 이 같은 애상적 포에지가 김연수 특유의 구성진 음악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한결 적절한 비애미를 직조해 내고 있는 노래가 곧 사철가이다.

사실 단가 사철가는 김연수의 '백조의 노래'이다. 백조가 죽을 때는 마지막 노래를 남긴다는 전설처럼 김연수 명창은 죽기전 이 사철가를 세상에 남겼다. 그가 작고하기 얼마 전 당시 동양 방송 PD로 근무하던 필자는 김연수 명창을 모시고 방송 녹음을 했다. 그 때 그가 고수 이정업의 반주로 판소리 몇 대목과 함께 불러 준 노래가 사철가이다. 오랜만에 녹음하러 온 그의 모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초췌했다. 녹음이 끝난 후 그는 전에 없던 주문을 해 왔다. 방금 녹음한 사철가를 조용히 다시 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녹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다고 총총히 돌아가던 여느때에 비하면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조용한 사무실 한구석에 녹음기를 틀어 놓고 방금 녹음한 사철가를 육중한 침묵과 함께 들었다. 사무실의 창살에는 희뿌연 석양이 쏟아지고 방송국 옆을 지나는 서소문길 공항로에는 부질없이 분주하게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가'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창의 눈은 지그시 감겼고, 병색으로 창백해진 표정에는 깊은 우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철가가 끝나자 두 명인의 콤비는 말도 없이 사무실 문을 나섰다. 얼마 후에 김연수 명창은 유명을 달리했고, 명창이 작고한 그 다음해에 당대의 명고수 이정업 옹 역시 '저승에 가서도 북 반주를 해 달라'던 명창의 권을 좇아서인지 끝내 타계하고 말았다.

사철가의 노래가 더욱 우수의 정념을 더해 주는 것은 바로 이처럼 '김연수 명창의 백조의 노래'였다는 간절한 사연이 묻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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