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국내역사

황희정승의 이야기

은행골 2011. 9. 1. 11:31

황희정승설화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조선 초기의 재상 황희에 관한 설화. 인물전설에 속한다. 그는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렇다할 정적(政敵)도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특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정승설화는
황희정승 이야기〉·〈계란유골〉·〈개가법 고치고 원망 산 황희〉·〈이인 황희정승〉·〈황희정승 탄생일화〉·〈황희정승과 딸〉·〈명판결을 내린 황희〉·〈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황희정승의 판결 등 아주 다양한 내용이 있다.
대체로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결국은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노장적(老莊的)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삽화가 많다. 또한, 그의 장례에는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나누어 입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청빈한 생활태도가 벼슬아치로서의 한 규범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 삽화가 많이 있다.
황희의 청백리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설화로는
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가 흥미롭다. 황희가 정승으로 살았으면서도 가난하게 살다 죽게 되자 여러 딸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방책을 마련해달라고 한다. 이에 공작이 날거미줄 먹고 사나, 남산 밑에 박광대가 하리라.고 유언한다.
그 뒤 중국에서 공작이 날아오자 황희의 지략이 생각나서 그 딸들에게 물으니, 그 유언을 말하므로 공작에게 날거미줄을 먹여 살찌워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로 황희의 가난한 처지가 밝혀져 어느 대감이 황희의 집에 달걀을 여러 수레 보냈다. 그런데 그 달걀에는 뼈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文宗實錄, 齋叢話, 海東名臣錄,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황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희
출생 1363년
개성
사망 1452년
국적 조선
별칭 호는 방촌, 자는 구부
학력 1389년 문과급제
직업 문인, 정치가

황희(黃喜, 1363년 ~ 1452년)는 고려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재상(宰相)이다.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뇌물수수[1] , 간통[2] 등 황희에 대한 좋지 않은 이력을 기록한 기사도 간혹 나타난다. 조선 세종 때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고려조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년)에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송경(松京 :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인 1376년(우왕 2년)에 음직으로 복안궁(安福宮) 녹사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곧이어 스물세 살 때 진사시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1389년(창왕 원년) 스물일곱 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편집] 조선 개국기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세자 우정자(世子 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 춘추관(藝文 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 감찰(司憲 監察)과 우습유(右拾遺)에 전직(轉職)되었는데, 이후에 경원 교수관(慶源 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그가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신사가 되던 때부터였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그 뒤에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대사헌·지의정(知議政)·견명사(遣明使)·참찬·평안도 도순문사·한성판사(漢城判使) 등 내외의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문물(文物)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와 함께 점차 왕의 신뢰를 쌓아갔는데, 그는 중추원을 없애 병제를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 이방원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후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편집] 유배 생활

그러나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1413년(태종 13년) 세자 제(禔 :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左遷)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편집] 복직

1422년(세종 4년) 태종은 그를 소환하여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비로소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그 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9세 되던 1431년(세종 13)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 87세로서 은퇴하였다.

그가 죽은 뒤 세종묘(世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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